승소한 날, 저는 가장 공허했습니다
여의도 증권가, 새벽 2시.
마지막 서명 날인이 끝난 계약서를 덮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수천억 원이 오가는 딜(Deal)이었고, 사내 변호사로서 제가 설계한 구조가 완벽하게 작동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로펌을 거쳐 대기업, 그리고 지금의 금융권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라는 궤적 위에서 저는 늘 '다음 목표'를 사냥하듯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연봉 계약서에 적힌 숫자가 늘어나고, 명함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제 내면은 기이할 정도로 가벼워지고 있었습니다. 승리감은 찰나였고, 퇴근길 택시 안에서 마주한 것은 지독한 허무였습니다.
"이제 다음은 뭐지?"
이 질문이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더 이상 오르고 싶은 고지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고지를 점령하는 순간, 삶을 지탱하던 나침반이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믿어온 '성취의 방정식'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날, '변호사가 되겠다'는 제 인생의 가장 거대했던 목표는 죽어버렸습니다. 대기업에 입사한 날, '취업'이라는 목표도 소멸했죠.
우리는 흔히 인생을 선형적인 퀘스트의 연속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숫자로 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부분 최적화의 오류'입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연봉을 높이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 했지만, 그 과정에서 건강이라는 기반은 무너져 내렸고, 가족과의 대화는 단절되었습니다. 승진이라는 깃발은 꽂았을지 몰라도, 삶의 전체적인 균형은 처참히 깨져 있었습니다.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스스로를 '실패자'라 규정하며 자존감을 갉아먹었죠. 이것이 바로 목표 지향적 삶이 가진 '방향성의 휘발성'입니다.
저는 이 불안한 쳇바퀴에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완전히 다시 짰습니다. 저는 이제 제 인생을 '해치워야 할 숙제'가 아니라, '평생 가꿔야 할 영토'로 정의합니다.
'영토적 사고'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삶을 점령하고 떠나는 고지가 아니라, 비옥하게 관리해야 할 토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을 크게 네 가지 영토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전문성의 영토: 단순한 승진이 아닙니다. 시장의 복잡성을 명쾌하게 해결하는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집니다.
관계의 영토: 의무적인 가족 행사가 아닙니다. 제 곁에 있는 사람들과 깊은 유대를 나누는 안식처입니다.
확장의 영토: 법률 지식 너머의 경제, 인문, 예술을 탐구하며 '나'라는 사람의 그릇을 넓힙니다.
기반의 영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적, 정신적 체력을 관리합니다.
이 관점을 도입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의 저는 "이번 달에 5kg 감량"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실패하면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저는 '기반의 영토를 경작하는 중'입니다. 오늘 운동을 하지 못했더라도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휴식을 통해 땅의 지력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야근으로 지친 날, 예전 같으면 "오늘 아무것도 못 했어"라며 자책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퇴근길에 아내에게 줄 꽃 한 송이를 삽니다. 그것은 '관계의 영토'에 물을 주는 의미있는 행위가 됩니다.
많은 직장인 분들이 번아웃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신의 하루를 처리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메일을 처리하고, 회의를 처리하고, 심지어 휴식조차 '재충전을 위해 빨리 해치워야 할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내 인생이라는 영토의 주인'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을 뿐입니다. 목표는 '끝'이 있지만, 영토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목표 상실 뒤에 오는 공허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더 이상 "10년 뒤 어떤 변호사가 될 것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렇게 자문합니다.
"오늘 내 마음과 손길이 가장 필요한 영토는 어디인가?"
이 질문 하나가, 쫓기듯 살던 저의 시간을 주도적인 몰입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쫓기고 있나요, 아니면 가꾸어지고 있나요?
지면 관계상 이 글에 모두 담지 못한, 4대 영토 설정법과 구체적인 대시보드 관리 전략은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만 조심스럽게 나누고 있습니다.
#커리어관리 #마인드셋 #전문직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