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을 읽고
어제는 구독하고 있는 북클럽의 4월 이달큐(이달의 큐레이터) 웨비나가 있었다. 아이들 저녁을 해먹이고 퇴근한 준영 저녁 차리는 것을 좀 도와주고서 책상에 앉았다. 4월 큐레이터는 <시대예보: 호명사회>의 송길영 작가였다. 책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유튜브에서 강의나 인터뷰하는 영상은 몇 번 관심 있게 찾아본 지라 이번 웨비나가 기대가 됐었다.
송길영 작가가 큐레이팅한 책은 <인성보다 잘 풀린 사람>이라는 소설집이다. 송길영 작가가 자기 책에서 인용한 책들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소설집은 장강명 작가가 2022년에 ‘월급사실주의’ 동인을 결성하고, 2023년부터 여러 작가들과 함께 노동과 생계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단편소설을 쓴 것을 묶어낸 것이었다. 이번 책은 2024년 시리즈였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한 번에 소설을 한두 개씩밖에 못 읽었는데 그 이유는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생각이 많아져서였다.
노동의 유연화가 이제는 거의 극에 달해서 정규직이라는 개념은 어느 분야에서나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일이 되었다. 각 소설에서는 노동의 불안정성, 기회 없음, 부동산 시장 급변화 등의 사회 현상과 맞물린 개인의 삶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딱히 별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그래서 각 소설들을 읽는 내내 어떤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얻긴 어렵다. 르포 같은 소설들을 읽으면서 전혀 소설 같지 않은 그냥 현실을 관전하는 기분이었는데 그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주변 지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씁쓸한 기분으로 책을 덮곤 했다.
기억에 남는 소설은 비건 식당에서 일하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힙하고 트렌디한 비건 식당을 운영하는 대표에게 스카웃 되어 에스엔에스 활동으로 팔로워를 늘려가며 가게 매출을 높이는 그런 인물에 관한 소설이었다. 정말 있을 법한 가게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고, 에스엔에스에서 인기몰이하는 계정들이 어떻게 팔로워를 늘렸는지 그 뒤를 훔쳐보는 것 같기도 했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자기의 개성조차도 시장 트렌드에 발맞추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사실은 전혀 비건이지 않은 비건 레스토랑 사장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보고 좋아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그냥 시장의 한 부속품에 불과한 자기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그 허탈한 기분이 느껴진다.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트렌드를 형성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벌떼같이 따라가 집채만 한 실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성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웨비나에서 송길영 작가는 그의 책에서 반복해서 얘기해 온 ’핵개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는 조직의 이름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대는 끝났고(또는 끝나가고) 각 개인이 자기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꼭 퇴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길영 작가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 거기에 시간을 쏟으라고 한다. 필요하다면 소비 규모를 줄여서라도 그냥 조직과 집단 속에 편안하게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겨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며 ’ 진정성‘에 대한 최근의 고민이 날카로워진다. 최근 책을 많이 읽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종의 카테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알고리듬은 내게 책을 소개해주는 사람, 책을 모으는 사람, 독서 모임 같은 에스엔에스 계정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날마다 새로운 이름들로 소개해준다. 책방에 다니는 재미에 들려서 틈날 때마다 가까운 도시마다 책방을 찾아다니는데, 책방을 둘러싼 여러 모임들이 활발한 것을 보며 독서 문화가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놀란다. 2019년에 어쩐 일인지 전국에 독립서점이 크게 늘었는데 독서 붐이 분 것인지, 이미 책과 책을 둘러싼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또 어떤 이들은 꽤나 성공을 거둔 것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책이 좋아서, 그 관심을 누군가와 같이 나누고 싶다는 순수한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내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미 책을 매개로 어떤 브랜드화까지 이루어낸 사람들을 보면 내가 책을 좋아하는 수준은 왠지 우습게 느껴진다. 그리고 독서에도 트렌드가 있는지 어느 에스엔에스 계정에서나 비슷비슷한 책들이 큐레이팅되는 것을 보며 마음도 복잡해진다. 내가 원한 건 어떤 트렌드에 탑승하고자 함이 아닌데, 책과 특히 문학이라는 거대한 다양성의 숲에서 나는 내가 즐거울 나만의 길을 찾고 싶은데, 왠지 이미 뚜렷한 등산로가 나있는 관광지에 도착한 기분이다. 흥미롭고 설렜던 탐구의 마음이 지루함으로 싸하게 식어진다.
최근에 한 책방에서 대표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나의 이런 고민이 어설픈 모양으로 툭 나오게 되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게 하나의 힙한 문화처럼 된 것은 좋은데, 그렇다 보니 나만의 취향을 찾고 누리는 게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라는 취지로 털어놓은 내 말을 듣고서 책방 대표님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 말의 의미가 와닿지 않았던 듯싶다. 그저 ’혼자 책을 읽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것도 너무 좋은 조언이었지만 내 고민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나는 취미가 쉽게 트렌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다시 말해 취미가 성급하게 상업화되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한 것인데.
또 샌님처럼 ‘순수함’. ‘진실함’에만 집착하는 내 모습을 본다. 내가 무얼 좋아해도 남들이 여럿이 좋아한다고 하면 먼저 나 자신을 의심하고 보는 지독한 버릇. 내가 진짜 그것을 좋아하는 게 맞나, 하고. 아니면 오히려 내 안에 ‘생계’에 대한 조급함이 있어서일까. 나야말로 성급하게 결말을 엿보려고 해서는 아닐까. 그래서 웨비나에서 송길영 작가가 말한, 무엇을 얻으려면 다른 무언가는 내려놓으라는 말이 내게 좀 더 와닿는다. 무언가를 좋아하면서 남들이 알아주기까지 바라는 것은 두 마음이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려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최근에 준영에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매 순간의 반짝임을 발견하다가 돌아보면 하나의 서사가 되는 여행처럼 인생을 살고 싶은데, 사회는 전략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차곡차곡 그 퀘스트를 수행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송길영 작가가 한 말이 그런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살고 싶은 여행 같은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또 에스엔에스를 멀리해야겠다는 도돌이표 같은 생각에 다다른다. 편한 등산로 말고 나라는 미지의 숲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