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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쓰기

먼 곳으로 데려가는

김하나, <금빛 종소리>를 읽고

by 어니

나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을 바라보면 마음이 꽉 찬 기분이 든다. 약간 숨을 헐떡이게 되는 설렘도 생긴다. 내가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도 책장들의 풍경 때문이다. 길을 걷거나 외국 도시의 여행지에서도 서점이나 헌책방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책을 주제로 한 어떤 공간에 들어갈 때 책장과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뿜어내는 공기 같은 것이 있다. 첫인상과 같은 그 공기를 훅 하고 들어마시는 것은 내가 자꾸만 추구하게 되는 경험이다. 친구 집에 초대를 받든,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가든 나도 모르게 그의 책장 앞으로 눈길과 발걸음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이 혹시 그 사람을 너무 대놓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책꽂이 구경해도 되냐고 먼저 묻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 나의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초등학생 때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나만의 침대가 생겼는데 내 침대가 가로로 길게 놓인 벽면에는 큰 책꽂이가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서면 어린이였던 나도 맨 위칸까지 손이 닿을 수 있었다. 나는 벽을 타듯 책꽂이 한 칸 한 칸을 유심히 보면서 다음 칸으로, 아랫 칸으로 옮겨 다니면 놀곤 했다. 그 책장은 부모님의 책꽂이였다. 엄마 아빠가 젊을 때부터 읽고 간직해 온 책들이었다. 이 책을 사고 읽을 때 엄마 아빠가 얼마만큼 젊었을까 생각하면 묘하게 설렌 기분이 들었다. 기억나는 제목들은 많지 않다. 책등이 빛바랜 그 책들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이문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이름들... 그리고 몇 권의 시집이 기억난다. 책장에 매달려 이 책 저 책 꺼내보다가 궁금한 것은 집어서 침대에 누워 읽어보기도 했다. 어떤 책들은 아직 어린이인 내가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 드는 책들도 있었다. 책 속에서 구경하는 어른의 세계는 자꾸만 궁금하고 알 수 없었다. 책을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가는 시간은 다른 세계, 엄마 아빠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전에 살던 전셋집을 고를 때 그 집 책장 때문에 그 집을 선택했다. 처음 집을 보러 간 날 그 집은 그전에 보았던 아파트 같은 단지의 여러 집의 특유의 느낌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가 끝나는 벽에 세워진 책장이 발산하는 분위기였다. 이 집의 주인공은 이 집 식구들이기도 하지만 이 책장이기도 한 것만 같았다. 나도 그 집에 살고 싶었다. 그 집 식구들은 이 책장과 함께 짐을 싸서 나갈 것이지만, 나도 책장이 하나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마침 그 복도 끝 벽에 채워진 책장은 내가 갖고 있는 책장과 똑같은 사이즈였고, 집주인들은 벽의 나머지 공간을 메우는 용도로 세워놨던 두 점의 CD장은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그대로 놓고 갔다. 그래서 나는 그 벽에 전 사람들과 똑같이 책장을 세워두었다. 그 집에 사는 내내 그 복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어린 시절 나처럼 그 책꽂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보았다. 엄마 책들을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뽑아 가지고 노는 그 모습만으로도 나는 위로가 되었다.

책에는 그런 힘이 있다. 시간을 뛰어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내가 엄마의 젊은 시절과 연결되었듯, 내 아이들이 미래에 현재의 나와 연결되듯. 특히 시대를 거쳐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읽히는 고전은 더욱 그렇다. 부모의 시절에 읽은 책을 자녀도 자기의 시절에 읽는다. 김하나 작가는 오랜 시간을 거쳐 사람에게 다가오는 고전의 매력을 금빛의 종소리라고 묘사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독서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문득 깨어 시각을 알리는 금속의 종이 울려오는 것이 연속적으로 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작품이 쓰인 시대와 독자 사이에 놓은 긴 세월을 그토록 오래 지나왔는데도 공기에 섞이지 않고 수평으로 들려오는 금속성 종소리처럼 연속적인 울림을 내는 것이다. … 작가가 옛 시대에 글을 쓰고 발표할 때는 그의 글이 울리는 종소리가 동시대 너머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계속해서 또렷한 파장을 일으킬 줄 알았을까?”

김하나 작가의 <금빛 종소리>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고전 읽기를 안내하는 취지로 기획된 책이었다. 400권이 넘는 세계고전작품 중에서 그는 딱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한다.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의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미국 작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의 <멕베스>,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그 다섯 권이다. 한 소설당 수십 페이지를 할애해서 김하나 작가는 각 작품에 대한 읽기를 안내한다. 그가 안내하는 고전 읽기는 스페인어 ‘디스푸르타르’처럼 마치 과일의 색감과 질감, 맛과 향을 즐기고 향유하는 것 같은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독서이다. 문학을 즐긴다고 할 때 그 이야기 전개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신화적 요소, 삶과 인간에 대한 문학적 질문들, 입체적인 등장인물들, 색깔에 대한 시각적 묘사와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리듬감 등 오감을 동원해서 읽을 때 새로운 차원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김하나 작가가 <맥베스>를 마흔이 되어 다시 읽고 ‘투모로우 스피치’ 부분에서 전엔 미처 느끼지 못한 인간 생에 대한 허무함과 무상함에 대한 깊은 공감을 했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말을 읽으며 나도 요 근래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도 소설을 좋아하곤 했는데 그때는 스토리가 흥미진진한가를 위주로 독서를 했다. 그래서 분명히 읽긴 읽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 감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 책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데미안>, <양철북>같은 책들은 얼핏 한 소재나 줄거리 외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책의 이야기가 당시의 나에게 그다지 흥미진진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대신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대지>는 너무 흡입력이 있어 다 읽고 그 강렬함에 한동안 사로잡히기도 했다. 30대 중반을 넘어 다시 고전을 탐독하는 요즘 나를 보면 스토리보다 쓰는 마음을 엿보는 독서를 한다. 극적일 것 없는 단편적인 사건, 조금은 생뚱맞은 것 같은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서 쓰는 이의 시선이 훅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순간 마치, 외롭지 않은 기분이 된다. 내가 외로운 줄도 몰랐는데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수십 수백 년을 넘어선 문장이 마치 내 마음을 읽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금빛 종소리>는 각 작품마다 가진 다른 매력들에 어떻게 초점을 맞추어 읽으면 그 진가를 맛볼 수 있는지 소개한다. 이 오래된 작품들이 현대 사회의 우리와 어떻게 공명하는지도 영화, 음악과 같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연결 짓기도 한다. 그리고 각 작품이 작가의 생전 사회 배경과 고유한 삶에 어떻게 잇닿아있는지도 소개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서는 유르스나르의 그의 동료이자 동반자였던 이에 대한 애정이 투영되었고, <순수의 시대>에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여성 삶과 일평생 글쓰기로 자유를 추구한 워튼의 시선이 담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지나온 시간의 지구 곳곳의 다양한 삶 속의 개인의 마음을 만난다. 문학 작품 자체만큼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것을 쓴 사람의 삶이다. 어떤 삶은 오늘의 나의 삶과도 닿아있다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김하나 작가는 그런 것을 ‘세계인의 교양에 접속한다’고 표현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넘어 전 세계 누구와도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고전 문학을 점점 더 찾게 되는 것일까. 어렸을 때 끈기 하나로 마지막 장까지 읽어냈던 책들이, 이제는 한 문장 한 문장 그 뒤에 느껴지는 글쓴이의 마음 때문에 한 장을 읽을 때마다 한숨을 몇 번씩 몰아 쉬게 되는 것일까. 그 내밀한 생각과 시선을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문장에, 작품 전체 구조에 녹여내는 그 기술이 놀랍고 경이로워서 책 한 권을 덮을 때마다 일상을 벗어나는 황홀함을 느끼는 것일까. 몇 주 전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잠들었을 때 정말 정말 슬픈 꿈을 꾸었다. 그 기민하고 총명했던 한스 기벤라트를 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젊은 시절의 헤세와 눈을 맞추고 뭐라도 위로를 건네고 싶어진다. 글을 쓰는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자기의 내면에 스스로 눈을 맞추고, 또 다른 시대의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마음이리라. 고전을 읽으면 글을 쓰고 싶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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