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넥서스>를 읽고
인간의 인간됨은 그 실수와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변화와 대화에 열려 있는 것에 있다. 인류의 지식도, 기술도, 제도도, 신앙도 그래야만 한다.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를 읽고 난 후 한마디 감상이라면 이렇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게 오랫동안 시정되고 적응하고 자정 되어온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끊임없이 변화해 온 거대한 유기체, 인류사회를 그렇게 비유한다면 우리가 그것의 일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특검 수사 과정에서 통일교의 주요 인사가 김건희에게 뇌물 청탁을 한 의혹이 일어 연이어 여러 교계 지도자 집무실을 압수수색한 일이 있었다. 종교의 정치 개입, 청탁 의혹, 교회와 권력의 유착 문제에는 관심 없이 혹자들은 이것을 교회 탄압이라고 비판했다. 이제껏 교회를 압수수색한 일은 없었다는 그들의 말에는 교회는 성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스스로 자정능력이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 신앙의 논리 안에서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을 하나의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는 생각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생각의 기반에는 절대 진리인 성서가 있다. 무오류한 성서와 그것에 기반한 무오류한 교회.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논리는 성서해석의 권위를 오로지 교회기관이 전유하고 교회와 성서를 비판하는 것을 원천봉쇄해 온 유구한 역사와 잇닿아있다.
짧지 않은 공부의 시간 동안 구약 성서를 연구하면서 배운 것은 히브리 성서는 그 자체로 처음부터 온전한 형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랜 시간 구전되고 기록된 문헌들이 역사의 특정 시점, 특정 공동체의 관점이 반영되어 형성된, ‘해석된’ 텍스트이다. 진공상태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 속 살아있는 사람들의 질문과 응답의 산물로서 형성된 것이 구약이다. 구약이 지금의 모습으로 형성된 가장 주요한 시대에 유대교는 제국의 지배 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 자체로 ‘책의 종교’로 구축했다. 불변하는 책에 완전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아주 미약한 공동체의 집결과 다음 세대로의 생존을 꾀한 것이다.
다가오는 새 시대에 맞는 책의 해석이 필요하면 그 해석의 주체인 랍비, 해석의 또 다른 산물 미쉬나, 미드라쉬가 또 다른 절대권위가 되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신적인 텍스트란 없다. 해석의 권한을 가진 이들에 의해, 시대의 관점을 통과해 선별되고 구성되고 전수되었다. 그러므로 해석의 대상이자 산물인 성서를 대할 때는 그것이 언제나 역사에 열려 있다는 태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인데, 이미 텍스트를 절대화하고 해석을 독점해 생존과 권위 유지의 도구로 삼아온 수천 년 유대교와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그것은 요원해 보인다.
유발 하라리는 성서와 교회의 무오류성에 기반해 벌어진 역사를 예로 들면서 인공지능의 시대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한다. 정보를 거의 무한대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을 무오류한 무언가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정보가 많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특히 알고리즘에 의해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가 형성되고 집단행동의 촉매제까지 되는 오늘날, 컴퓨터의 자체 의사결정 능력은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무한한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컴퓨터조차 글로벌 사회의 자정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자정 장치에 한 가지 제동 원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에 신경 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너와 나, 생명체가 느끼는 고통이야 말로 그 어떤 이념적, 물질적, 종교적 가치를 초월하는 보편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작년 모대형 교회에서 몇 주간 진행된 집회 이후 영상제작을 하던 직원이 과로사한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미 수년간의 과도한 근무시간, 비합리적인 업무 구조, 잦은 장거리 출장이 누적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도 성도였을 것이다. 산재처리를 약속했다가 뒤에선 자료를 삭제했다던 교회의 태도는, 교회의 질서와 권위에 반할 때 사람을 쉽게 배제해 버리는, 너무 많이 목격해 온 방식이다. 내가 어떤 예배, 어떤 집회, 어떤 행사에서는 더 이상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다. 한 사람의, 한 생명의 고통에 무감각한 채 그 자체로 비판불가의 성역에 속한 교회의 모습. 고통 중에 읊었고 전수되고 역사의 굴곡 속에 해석되어 온 성서의 깊은 정수에 귀 기울이면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유발 하라리는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인류의 지난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비관적으로 조망하면서도 하나의 실낱 같은 희망으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촉구한다. 나도 언제나 교회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성서가 그 안에 담아 온 역사 자체가 인간의 질문과 응답, 해석의 과정이라면 교회도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지닌 기관으로서 역사 앞에 늘 새로워질 수 없는가 하고. 유발 하라리는 비관하고 있는 종교의 역할이 여전히 인류의 공생과 평화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그러기 위해선 오늘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