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언덕과 들이 완전히 주황색일 수 있을까?’ 한국에서 나고 자라, 애 둘까지 낳고 미국에 온 나로서는 언덕이란 봄 여름엔 푸른빛, 가을 겨울엔 갈색이었다.
중학생 시절, 텔레비전에서 주황색 언덕이 끝도 없이 펼쳐진 광경을 보며 지구상에 저런 곳이 존재한다면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소박한 바람은 당시엔 비현실적인 것이었기에 내 머릿속에서 금방 잊혀져 갔다. 그런데 기억 저 깊은 속에 묻혀 있었던 십대 소녀의 작은 소원이, 이민이라는 먼 거리로의 공간 이동을 거친 후 이뤄지게 되었다. 주황 꽃들이 바람 따라 쉼없이 넘실대는 언덕, 앤텔롭밸리 파피꽃 보호구역(ANTELOPE VALLEY POPPY RESERVE)을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들뜬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파피꽃 언덕을 찾아
그 신비의 장소가 내가 사는 곳에서 1시간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뿐이다. 로스앤젤레스 출발을 기준으로, 5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상하다가 14번 동북쪽 팜데일(Palmdale) 가는 고속도로를 갈아탄다. 팜데일을 지나 랭캐스터(Lancaster) 시, ‘웨스트 애비뉴 아이(W. AVE. I)’에서 내려 좌회전 하여 15마일 정도 더 가면 보호구역이 나온다.
보호구역 입구 몇 마일 전부터 그 기운이 심상치 않다. 멀리 설산을 보며 달리는 편도 1차선 정겨운 시골길 옆에는 노랗고, 하얀, 그리고 보라색을 띤 키 낮은 야생화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봄바람이 세찬 걸로 유명해서, 모래바람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야생화들은 그 키가 아주 낮다. 색색 꽃들이 줄기 없이 뿌리와 붙어서 피는 듯하다. 노란Goldfield와 Coreopsis, 자주와 보라색 Owl’s Clover와 Lupine, 하얀 Cream Cups 등, 봄꽃들을 가지고 자연이 들판에 만들어낸 모자이크는 질긴 생명력을 드러낸다. 보호구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그 넓은 지역에 펼쳐진 주황꽃 군무!
파피꽃은 야생 양귀비로, 캘리포니아 주를 대표하는 꽃으로, 한국어로는 금영화라고도 한다. 학명은 Eschscholtzia Californica이고, 양귀비 과이며 원산지는 북아메리카이다. 개화 시기는 3월 중순에서 5월초이지만 대체로 4월 초순이 가장 아름답다. 일조량과 바로 전 겨울 강수량(캘리포니아는 겨울이 우기이다) 등이 개화에 큰 영향을 준다. 겨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았거나, 비가 많이 내렸다 해도 이듬해 봄에 구름 끼는 날이 많다면 만개한 파피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방문자 센터(Jane S. Pinheiro Interpretive Center)에서는 이곳에 사는 동식물 표본과 생태를 살펴볼 수 있고, 비디오 관람도 가능하다. 그림, 사진, 머그컵 등등, 파피꽃 관련 기념품 등도 판매한다.
완만한 언덕을 따라 만들어진 여러 트레일 코스는 일반인은 물론 노약자나 어린 아이들이 걷기에도 어렵지 않다. 걷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게 포장해 놓은 곳도 있고, 군데군데 벤치를 설치해 놓아 방문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였다. 걷다 보면 도심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각종 새들, 도마뱀, 덩치 큰 메뚜기들을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코요테, 살쾡이, 캥거루 쥐, 전갈, 방울뱀 등을 만날 수도 있다. 특히 뱀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놀라게 되지만 여기에 서식하는 뱀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공원 곳곳에서 방문자들을 돕는 레인저들은 원하는 사람들에게 뱀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건장한 남자도 날려버릴 듯한 이곳 봄바람에 감기 들지 않으려면 방문 시 꼭 겉옷을 준비해야 하고 세차게 내리쬐는 햇볕으로부터 눈과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선글라스와 선블럭크림, 챙 넓은 모자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매년 4월 중순에는 파피꽃 보호구역 인근 한 공원에서 파피 축제도 연다.
사막에서 보석 찾기
미 서부는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정말 많은 곳이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깊은 산세로 유명한 요세미티를 포함한 국립공원들, 환상적인 해변들로 즐비한 서부 해안가,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 등등. 그런데 조물주는 빛나는 주황 보석을 숨겨 놓을 장소로 이런 곳을 선택하지 않았다. 보물은 외딴 곳에 숨겨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봄만 되면 인적 없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조물주의 주황색 보석, 파피꽃이 만발한다. 이 주황 꽃은 마법에서 깨어나듯 피어, 어느덧 그 넓은 언덕을 점령하고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는다.
오스카상 시상식 때 배우들이 열렬한 환호 속에 마치 왕과 여왕이라도 된 듯, 우아한 자태로 레드카펫을 밟고 계단을 오르듯, 온 힘을 다해 몸을 흔드는 파피꽃의 환호를 받으면서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본다.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들이 양귀비 밭에 들어갔다가 향기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면, 이곳에서는 파피꽃 군무에 매료되어 정신이 아찔해진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바람 센 사막 한가운데에서 마치 마법이 풀려 일 년에 딱 한 번 본 모습을 찾기라도 하듯, 봄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주황 꽃을 피워내는 파피. 우리 인생도 어떤 부분은 마법에 걸려 본 모습이 가려져 있는 건 아닐까? 끝도 없는 사막을 걷는 것 같은 순간, 왜 이런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숨겨진 보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봄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좋고, 사막은 오아시스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곳만큼은 파피꽃이 있어 아름답다. 사계절 중 첫 계절인 이 봄에, 파피 언덕을 오르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보석을 발견하는 행운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