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나는 이재에게 붉게 핀 열꽃을 보고 분노와 원망을 느꼈던 그날의 감정을 동력 삼아 시댁과의 관계를 재정의했다. 더 이상 순응하는 며느리가 아니었다.
나는 나정식에게 단호히 선언했다. "어머니께 매일 이재 사진을 보고하는 건 내 업무가 아니야. 당신이 퇴근해서 직접 찍어 보내. 나는 이재 케어에 더 집중할 거야." 남편은 당황했지만, 나는 덧붙였다. "친정 부모님도 감기라도 걸릴까 봐 보고 싶어도 못 오시는데, 시부모님 방문 횟수도 이재 컨디션 생각해서 조율해 줘."
나의 예상치 못한 단호함에 나정식은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이재의 백일 날, 나는 시어머님의 삼신할매상 요청은 수락하되, 나정식의 '지방 출장'을 핑계로 방문은 막아냈다. 그렇게 나는 이재와의 소중한 공간과 시간을 지키며, 종전 기약 없는 시월드 방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지켜낸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고, 밥도 못 먹고 못 씻고 못 자도 이재가 주는 기쁨은 상쇄하고도 남았다. 말 못 하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어주는 모든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온 하늘의 선물이었다. 나는 이재에게서 잃어버렸던 나를 채워나갔다.
이재의 첫 생일인 돌이 가까워지면서, 나의 복직 시점도 다가왔다. 바닥 고과의 불안감 속에 복직 신청을 한 나는, 어떤 한직으로 밀려날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한여름 씨? 저는 새로 전략 프로젝트팀을 맡게 된 하 팀장이라고 합니다. 한여름 씨 복직 신청서를 봤는데, 저희 팀으로 오셨으면 해서요. 면담하러 회사에 한번 나와 주실 수 있을까요?"
전략 프로젝트팀! 이름만 들어도 유리 천장 너머의 핵심 부서였다. 나의 바닥 고과와 지원부서 경력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의 잠재력을 알아봐 준 것만 같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나는 당장 나정식에게 연락해 이재를 부탁했고, 오랜만에 출산 전 입었던 정장을 꺼내 입었다. 차가운 유리 천장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일잘러 한여름이, '닭엄마'가 된 새로운 모습으로 회사 복귀를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