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 맛있으면 삶은 미슐랭이다
몇 년 전,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
필리핀에서 30년 넘게 살았던 분이었다.
함께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 나를 초대한 자리였다.
그날은 방송국 촬영이 있는 날이었고,
나는 그날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전날 사고가 있었다.
감기약 인줄 알고 먹었던 약이
알고보니 알러지약이었고, 나는 그것을 과복용해서
온몸이 몽롱한 상태를 넘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알람이 울려도 꿈속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눈을 뜨니 약속 시간은 1시간 남짓,
서울까지는 1시간 반 거리.
그날따라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타고
상암 MBC로 향한다고 말했지만,
도착해서 보니 거긴 목동이었다.
그제야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상암이 아니라 목동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PD님의 목소리는
이미 눈물 한 방울이 섞여 있었다.
결국 나는 그날의 촬영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준비한 인터뷰,
기대했던 방송,
모든 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기회를 잃은 사람의 마음이란 참 복잡하다.
죄송함, 후회, 그리고 묘한 자괴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며칠 동안 자책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날은 꼭 그런 일이 생겼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날의 실수가 내게 다른 걸 가르쳐줬다.
그날의 실수는 나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었다.
완벽한 날은 기억에서 금세 사라지지만,
실수한 날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회’라는 건
늘 반짝거리는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실패의 껍질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시험에 떨어졌다고,
면접에 탈락했다고,
다시 그런 기회는 없다고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모양의 기회’가
조용히 우리 곁에 서 있다.
마치 유명 맛집을 찾아갔는데 예약이 다 차서
쫓기듯 나와버린 그 순간,
길가의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는데
의외로 그곳이 ‘인생 맛집’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놓친 것은 ‘기회’가 아니라
기회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초라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나를 위한 타이밍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날 내가 방송을 놓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여전히 완벽한 척하며
조급하게 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가끔
‘길 잘못 든 사람’을 위한 표지판을 세워둔다.
그리고 그 표지판은
언제나 조금 늦게,
그리고 조금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난다.
그러니 너무 낙담하지 말자.
기회는 가끔 우리를 시험하는 척 하면서
다른 문으로 몰래 들어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하는 게 아니라,
조용히 창문 쪽으로 걸어가 보는 것.
결국 인생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그때그때 찾아오는 ‘허름한 식당의 행복’을
맛볼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한 끼가,
때로는 그 어떤 미슐랭보다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