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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Sep 06. 2023

무직자 개굴씨의 일일

#1. 느지막이 일어나 어제 '디트랙스'앱으로 미리 예매해 둔 티켓을 확인한다. 대전에서는 이미 내린 지 오래라 볼 수 없었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현재 시간은 오전 열한 시. 영화 시작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바로 근처에 독립영화관인 '더숲아트시네마'가 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하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상쾌한 겨울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2. 영화는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아직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가슴을 부여잡고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서울시립미술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천경자'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다. 시청역에서 내린 후 좀만 걸으니 미술관이 나온다. 전시장 입구에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다시 가슴이 뛴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이 가득하다.


#3. 전시를 다 보자 어느덧 네 시가 넘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하지만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고소한 와플냄새에 걸음을 멈춘다. '리에제 와플'에서 블루베리크림치즈와플과 핫초코를 포장해 벤치에 앉아 먹는다. 어디선가 감미로운 선율이 들려온다. 이름 없는 예술가가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와플을 먹으니 더 맛있게 느껴진다.


#4. 홍대입구 역 앞에서 동생을 기다린다. 지각쟁이 동생은 오늘도 늦는다. 홍대 맛집 '천사곱창'에서 저녁을 먹는다. 너무 맛있어서 괘씸함이 사르르 녹는다. '제이엘씨어터'에서 연극 '망원동 브라더스'를 보기로 했다. 평일 저녁인데도 소극장이 꽉 찼다. 연극은 원작 소설만큼 재밌었다. 극장 앞 포토존에서 기념사진도 찰칵. 늦은 시간에도 홍대 거리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더 놀고 싶지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서울에 사는 개굴씨의 하루 일과다. 물론 서울에 산다고 매일 이렇게 살진 않을 것이다.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울은 마음만 먹으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다.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대전에는 독립영화관이 딱 두 곳밖에 없다. 이 숫자도 군(郡) 단위의 다른 지방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다. 하지만 집이랑 멀어서 쉽게 갈 수 없고 보고 싶은 영화가 나와도 상영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봐야지, 봐야지 되뇌기만 하다가 한참 후에 결국 OTT 사이트에서 보게 됐다. 극장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게 명백한 영화라면 아쉽기만 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그런 영화였다. 화려한 영상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본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이기 때문에 몰입이 필수였다. 큰 화면에서 거침없는 액션과 CG를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기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잘 됐다. 지인은 이 영화를 보다가 정신없어서 도중에 껐다고 했다. 영화관에서 봤더라면 틀림없이 감상평이 달랐을 것이다.

서울엔 독립영화관이 18곳이나 있다. 거의 모든 구마다 있어서 어디에 살더라도 예술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냥 영화를 상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사회, GV(Guest Visit-영화 상영시 감독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직접 방문해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관객들과 질의응답도 주고받는 무대) 등 영화를 더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는 행사들도 많이 열린다. 대전의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는 관객이 나 혼자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자꾸 없어진다. 수요가 없으니 버티지 못하고 망한다. 문화 사각지대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서울은 진입이 수월하니까 누구든 영화관에 오는 게 어렵지 않다. 언제든 관객이 있다. 서울의 인프라가 더욱 견고해진다. 한쪽은 자꾸 기울고 한쪽은 자꾸 올라간다.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대전엔 작은 미술관까지 합하면 열 곳 남짓 있는데 사실 대표적인 미술관은 시립미술관 하나라고 보면 된다. 대전에 살면서 시립미술관과 대전창작센터 두 곳에 가봤다. 반면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디뮤지엄, 아르코미술관 등 큼직한 전시관들이 많다. 데이비드 호크니, 에드워드 호퍼, 장 미쉘 바스키아 등 유명한 화가들의 전시도 자주 열린다. 심지어 위에서 말한 천경자 화가의 전시는 상설 전시라 무료다. 천경자는 60여 년에 걸쳐 그린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나는 공짜로 그녀의 혼이 담긴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또 주민등록 주소지가 서울로만 되어있다면 서울에 있는 수많은 도서관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당연히 도서관은 대전에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다르다. 나는 대전에서도 도서관을 이용했기 때문에 차이를 더 크게 느꼈다. 서울의 대표 도서관인 '서울도서관'도 아닌 동네의 '노원중앙도서관'만 가도 (과장을 보태서) 없는 책이 없었다. 설마 이런 책까지 있겠어? 하고 검색해 보면 다 나왔다. 대전의 노은도서관도 결코 작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그곳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책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노원중앙도서관은 각종 문예지와 잡지도 달마다 배치해 두어서 정기구독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문예지도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대전에 살았을 때 소극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극단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관객석은 대부분 교양과제를 하기 위해 억지로 온 대학생들과 초대권을 들고 온 아는 얼굴들로 듬성듬성 메꿔졌다. 우리 극단이 올린 공연이 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최소한의 인원들끼리 소품을 준비하고 배우들이 직접 분장을 하고 조명을 달았다. 티켓 값은 삼만 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일 때라 극단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순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받아야 겨우 풀칠을 한다는 것 정도는 직감으로 느꼈다. 비싼 가격 때문인지 제 돈을 주고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홍대의 극장은 객석이 가득 차 있었다. 비교적 가볍고 쉬운 연극이니 작품성이 높은 연극을 주로 공연하던 극단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씁쓸했다. 티켓 값은 만 오천 원이었다. 싸고 재밌으니 수요가 더 많을 수밖에. 경기도 의정부가 고향인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보러 대학로를 다녔다고 한다. 연극 자체를 성인이 돼서 본 나와는 달랐다. 수도권에만 살아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싶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대학로 연극을 본 적이 없다. 이 참에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찾아보니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공연 예정이길래 냉큼 찜해두었다.


서울에서는 도시락만 챙겨 나온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다. 심심하면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콧바람을 쐬러 한강에 갈 수도 있고 한가로이 궁을 산책할 수도 있다.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도시가 서울이라지만 벌이가 없는 백수에게도 문화생활의 기회를 주는 곳도 서울이다.

옛 로마의 극장은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계층이 무료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은 로마보다도 못한 것 같다.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는 문화차별국이다. 서울에 살지 않으면 누리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 때문에 나를 포함해 지방에서 염증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지방엔 점점 젊은이들이 사라진다. 서울공화국이라 욕하면서도 공화국에 입성하고 싶어서 몸부림친다. 일조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다.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는 대전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벌써 올챙이 적 생각은 하지 못하는 개구리가 되었나 보다.

개굴-.


백수의 안식처 '더숲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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