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유난히 조용했다. 청와대 뒤편,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정원에서 박정희는 천천히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군인의 그것처럼 단단했지만,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정원 너머로 들려오는 참모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는 혼자였다. 아니, 늘 혼자였다. 그의 곁에는 늘 누군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내면에 닿지 못했다. 권력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그 고립 속에서, 그는 몇몇 여인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단순한 동반자가 아니었다. 때로는 위안이었고, 때로는 거울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나타났고, 조용히 사라졌다. 정인숙. 이름조차 낯선 이 여인은 1970년 봄, 서울의 한 골목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으로 보였지만, 그 수첩 속 이름들은 단순하지 않았다. 박정희, 김형욱, 정일권.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름들이 그녀의 삶에 얽혀 있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단순한 접대부였을까, 아니면 권력의 비밀을 품은 여인이었을까. 박정희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의 눈빛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정인숙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궁정동의 벽에 남아 있었다.
궁정동 안가. 그곳은 권력의 심장이었고, 침묵의 요새였다. 박정희는 그곳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참모들과 함께, 혹은 몇몇 여인들과 함께. 그 밤의 술자리는 단순한 향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로한 권력자의 자아를 잠시 내려놓는 의식이었다. 그 자리에 동석한 여성들 중 일부는 연예인이었고, 일부는 이름 없는 여인이었다. 그들은 박정희의 말에 웃었고, 그의 침묵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의 마음을 열게 하지는 못했다. 김재규는 그 술자리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 체제는 무너지고 있다.” 여인들의 웃음소리는 권력의 균열을 감추기 위한 장막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조용했다. 한혜숙. 1970~80년대의 인기 여배우였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방송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궁정동 안가와 그녀를 연결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어떤 이는 그녀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단순한 루머라고 했다. 진실은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흘렀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종교에 귀의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선택을 궁정동과 연결지었지만, 그녀는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오래 지켜봤다. 그는 충성했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박정희의 곁에 있는 여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 체제는 사유화되고 있다.” 그는 안가의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눈빛을 읽었다. 피로, 고독, 그리고 무관심. 여인들은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 위로는 권력의 고독을 덮지 못했다. 김재규는 결심했다. “나는 체제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은 총성으로 이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밤은 피로 물들었다. 박정희는 쓰러졌고, 차지철도 함께 쓰러졌다. 김재규는 말없이 앉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혁명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체제를 멈춘 것이다.” 그날 밤,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여인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권력의 끝은 그렇게 찾아왔다.
박정희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김재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은 움직였고, 군을 장악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진실은 침묵 속에 묻혔다. 정인숙의 죽음, 안가의 여인들, 한혜숙의 침묵.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로 엮였다. 그것은 권력과 인간, 그리고 시대의 이야기였다.
세월이 흘렀다. 궁정동은 철거되었고, 무궁화동산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밤의 총성은 여전히 기억 속에 울린다. 한 시민은 말했다. “김재규는 그림자였고, 박정희는 심장이었다. 그날, 그림자가 심장을 꿰뚫었다.” 그 말은 시대의 평가였다. 그리고 그 평가 속에서, 여인들의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갔다. 그들은 권력의 곁에 있었지만, 권력의 중심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시대의 균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