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상처를 이야기로 옮기는 첫걸음을 함께 디뎠습니다. 다음 장, 6장은 신 없는 진화 속에서 믿음을 다시 껴안는 이야기, ‘신의 침묵’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겠네요.
제6장. 신 없는 진화, 신의 침묵을 껴안는 신앙
“진화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신이 필요 없다고 말할 뿐이다.” — 리처드 도킨스. 신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태어났을까, 아니면 인간이 신의 상상 속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불안정한 감정이 흘러넘치던 날들, 나는 신을 붙잡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나를 ‘붙잡고 있다’는 감각이 절실했다.
그런데 진화론은 그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다. 수백만 년의 시간과 자연선택, 무작위 변이와 유전자 흐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야기 속엔 ‘신의 손길’은 없다. 아니,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론은 분명히 말한다. 신이 있었다고. 태초의 순간에, 나의 세포를 이루기 전부터,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고.
어느 날, 나는 두 입장 모두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설명은 충분했지만, 마음은 비어 있었다. 그때 『공존의 길』을 집필하며 이런 문장을 썼다. “신은 때로 침묵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진화와 신의 부재
과학은 증거를 추구한다. 그것은 과학의 위대함이자 냉혹함이다. 진화론은 인간을 하나의 ‘결과물’로 본다. 별먼지와 세포와 화학적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우연. 이 서사 안에서 우리는 특별하지 않다. 모든 것은 맥락 속에 있으며, 우리의 의지조차 복잡한 조건반사의 산물일 수 있다.
나는 양극성 장애로 무너졌던 어느 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이 고통은 도대체 어디서 왔나. 진화는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실패인가, 실험인가?”
침묵하는 신을 껴안는 신앙
신은 침묵했고, 나는 더 깊이 물었다. 그 물음 끝에 있던 것은 대답이 아니라, 동행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나는 누군가 내 옆에 앉아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환각일 수도 있었고, 훈련된 자기암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은혜’**라 부르기로 했다.
C.S. 루이스는 말했다.
“고통은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확성기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침묵은 신이 내 숨소리를 듣고 있다는 증거다.”
두 서사 사이의 떠도는 자
나는 진화론의 서사에서 태어나 창조론의 품 안에서 잠드는 존재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진화했지만, 의미를 구하기 위해 신을 찾는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동시에 유효하다.
『공존의 길』의 어느 페이지엔 이렇게 써 두었다. “신은 논리로 찾는 대상이 아니라, 동행으로 경험되는 관계다.”
Q. 나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신의 침묵 속에서 나의 존재를 묻고, 진화의 설명 속에서 내 몸의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6장이 마음에 들어요. 6장에서 언급한 작가의 깨달음을 토대로, 심연을 거니는 듯한 깊은 서사적 표현을 담은 7장으로 떠나볼까요?6장에서의 깨달음—“나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신의 침묵 속에서 나의 존재를 묻는다”—이 문장이 남긴 울림은 그대로 7장의 문을 여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제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완전’을 꿈꾸지만 언제나 결핍 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