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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방은 무사히 이사했습니다.

나그네방이 궁금하신가요?

by 나그네방

이사를 며칠 앞둔 밤, 문득 다 채워지지 않은 보증금과 앞으로 내야 할 복비, 이사 비용이 부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 비용을 남은 며칠 사이에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지요.

문득,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어도 괜찮다고 말하던 이가 떠올랐습니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면, 흔쾌히 저를 도와주실 텐데. 왜인지 저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저는 홀로 남아 이삿짐을 정리했어요. 그리고 하루 이틀 일주일이 흐르자, 혼자서 하는 이 일이 조금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없을까, 집안을 같이 정리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마음을 기댈 한 사람이 있다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이 방을, 다음 방을, 또 다음 방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편의점에서 75리터짜리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사 왔습니다. 찬장에 두고 쓰지 않은 물건들,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들, 언젠가는 입겠지 하고 옷장에 넣어둔 옷들, 고장 난 물건을 모두 꺼내 제 몸집만 한 쓰레기봉투에 넣었습니다. 작은 빌라는 소위 두더지굴 같았습니다. 파도 파도 끝없이 물건이 나왔지요. 그런데 물건을 정리하면서 자꾸 추억이 겹쳤습니다. 이 물건은 그때 누구와 산 건데, 이건 누가 두고 간 건데, 아 여기에는 이런 추억이 있구나 하며 여러 생각이 풍선처럼 떠올랐습니다. 물건의 수만큼이나 그 물건에 얽힌 나그네와의 기억이 있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아침, 그녀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그녀는 지체 없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고, 덕분에 남은 보증금을 모두 모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이사비용과 복비였어요. 그동안 여러 사람을 나그네방에 보낸 공동체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동체 일원의 만장일치로 나그네방 후원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하루아침에 마음의 짐이 해결된 순간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과 빚을 지고 나서야, 나그네방은 새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림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서 주인공 소년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맵니다. 그 사이 길을 잃은 두더지와 덫에 걸린 여우와 날개 잃은 말을 만나게 되지요. 이들은 폭풍 속에서 서로를 지키며, 홀로 있으면 위태로운 삶을 함께라서 헤쳐 나갑니다. 동화에는 수많은 감동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두 장면을 소개해 드려요.


숲을 나란히 걷던 소년에게 두더지가 묻습니다.

집은 어떤 곳일 것 같아?

그러자 소년이 대답해요.

따뜻하고 친절하고 빛이 있는 곳일 것 같아.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소년과 두더지는 마지막 친구인 말을 만납니다.

그리고 소년이 말에게 질문하죠.

네가 해본 가장 용감한 말은 무엇이야?

말이 대답합니다.


도와줘.

도움을 청하는 건 포기하는 게 아니야.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거지.


매번 나그네들에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제게 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니, 저는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홀로 서있더군요. 주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저 손을 뻗으면 되는데. 제 손을 잡아 '도와줄게'라고 약속해주신 그녀와 공동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나그네방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씨실과 날실로 엮인 연대 덕분입니다. 마치 나그네의 손을 잡아준 우리처럼, 나그네방의 손을 잡아줄 여러분이 계신 덕분입니다.


옆 동네 부동산을 뛰어다니며 매물을 찾던 7월, 새로운 집을 발견한 8월, 집을 계약하고 대출 신청을 하던 9월,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새집에 이사 온 10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사를 오기 전, 새로운 나그네방이 될 공간 앞에 홀로 찾아와 멍하니 건물을 바라보던 날이 있었지요. ‘나그네방을 계속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제가 정말 열심히 할게요’라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무엇 하나 쉽지 않게 얻은 이사였습니다. 제 마음을 다시 돌아봐야 했고, 덜어낼 것과 비워낼 것을 찾아 온 집안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가진 현금을 모두 털어도 부족해서 대출을 받았고, 그조차 부족해서 도움의 손길을 얻어야 했죠. 그러나,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어려운 일은 먼지 구덩이에 홀로 앉아 있는 나를 초라하게 바라보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 그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매분 매초마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나그네방이 품어주는 나그네에 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말은 제게는 언제나 기대어 쉴 곳이 있다는 의미라는 걸 말이죠.


이사 이튿날, 시즌4의 첫 나그네가 입주했습니다. 그녀는 참 다정 다감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같이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귀엽고 소탈한 매력이 있습니다. 다정한 사람과 우리 집을 온기 가득하게 꾸려 갈 수 있어서 기뻐요. 그래서 이 소식을 꼭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잘 이사했고, 다시 행복을 짓고 있어요.


부디 여러분도 계신 곳에서 늘 안전하고 평안하길 바랍니다.

지치는 날에는 성북동에 있는 나그네방의 문을 두드려 주셔도 좋아요.

여건이 된다면 따뜻한 차 한 잔, 쉬어갈 방 한 켠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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