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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Jul 18. 2021

인어 왕자


저 멀리 드넓은 바다와 가까운 언덕에 궁전이 있었습니다. 궁전은 왕자의 성인식이 한창이었죠. 화려한 조명과 시끌벅적한 분위기, 온갖 음식들과 마실 것, 쉬지 않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까지. 어둡고 파도 소리만 조용히 속삭이는 바다와 다르게 궁전의 불빛은 밤새 꺼질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입고 있는 무도회복은 몸에 꽉 끼어 답답했고,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손님들에게 환하게 미소를 보여야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려는 이웃나라 공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괴로웠어요. 왕자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람을 쐬기 위해 궁전 밖으로 나갔습니다.     


밤공기는 시원했습니다. 파도 소리가 왕자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왕자는 해변에 주저앉아 멍하니 밝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았죠. 그때, 왕자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습니다. 한 여자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왕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은 난생처음 보았던 것입니다. 상체를 가릴 정도로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오똑한 코, 푸르게 반짝이는 눈빛에 왕자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인어공주였습니다. 열다섯 살 생일을 맞아 바다 위로 올라온 아름다운 인어였죠. 왕자는 해변의 돌무덤 뒤에 숨어서 헤엄치는 인어공주를 한참이나 훔쳐봤습니다. 궁전으로 돌아온 뒤에도 머릿속에서 인어공주의 모습이 아른거렸어요. 왕자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인어공주를 보기 위해 밤마다 바다로 향했습니다.     


사실 인어공주 역시 왕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인어공주가 용기를 내어 왕자에게 헤엄쳐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왕자는 크게 당황했지만 이내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서로 수줍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죠. 왕자는 인어공주에게 인간들이 사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래 만난 사이처럼 금세 마음이 통했어요. 인어공주는 인간 친구가 생겨서 매우 기뻤습니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되어 바다 위로 올라가게 되면 꼭 인간 친구를 사귀고 싶었거든요. 왕자 역시 인어공주와 가까워질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밤 같은 장소에서 끝이지 않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왕자가 궁전에서 챙겨 온 음식들을 나눠 먹고, 밤바다에서 물장난을 치며 수영도 했습니다. 인어공주의 손을 잡고 물 위에 나란히 누워 찬란한 달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죠.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죠. 사랑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인어공주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왕자에게 충격적인 일이 찾아왔습니다. 이웃 나라 공주 중에서 약혼자를 골라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왕자는 인어공주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호했습니다. 왕자는 괴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처럼 해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던 왕자와 인어공주. 그녀는 근심이 가득한 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왕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약혼자를 정해야 하지만 나에겐 당신밖에 없다고, 당신과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울면서 말했죠. 인어공주는 왕자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왕자를 해변에 남겨두고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인어공주가 향한 곳은 바다 깊은 곳 마녀의 소굴이었습니다. 마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인어공주를 맞이했죠. 인어공주는 마녀에게 사람을 인어로 만드는 약을 부탁했습니다. 마녀는 그 약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했고 솔직하게 대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인어공주는 어쩔 수 없이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죠. 마녀는 흥미롭게 듣고선 흔쾌히 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푸르게 빛나는 약을 건네며 한 가지 지켜야 하는 것을 강조했어요. 바로 그 왕자와 반드시 3일 안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왕자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리게 되죠. 인어공주는 왕자와 자신의 사랑을 확신했기에 마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해변가로 돌아온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약을 주었습니다. 약을 먹으면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지만 왕자는 망설이지 않고 한 번에 약을 삼켰습니다. 약은 굉장히 썼고, 왕자의 다리는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왕자는 인어가 되었습니다. 새롭게 생긴 지느러미는 푸르게 빛났죠. 왕자는 이제 인어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미련 하나 없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닷속 세상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형형색색의 수많은 물고기들과 해초들, 거대한 거북이와 빛나는 해파리들, 인어공주와 함께 손을 잡고 헤엄치는 순간은 짜릿했습니다. 돌고래들도 그들 곁에서 기뻐하며 헤엄쳤죠.     


인어공주는 왕자를 데리고 바다의 왕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왕국에는 많은 인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어공주와 왕자를 환하게 반겼습니다. 그들 중 가장 빛나는 지느러미를 가진 다섯 인어들이 다가왔습니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다섯 언니들을 왕자에게 소개했죠. 왕자는 인어공주의 할머니도 만났습니다. 인어공주는 할머니에게 왕자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고 둘의 결혼을 허락해달라 부탁했습니다. 왕자가 마음에 들었던 공주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3일 후, 왕자와 인어공주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왕국의 인어들과 온갖 바다생물들이 모여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왕자와 인어공주는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좋은 날들이 가득할 것만 같았죠.     


그때, 왕국의 문으로 마녀가 들어왔습니다. 결혼식장에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마녀는 인어들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아무도 그녀를 초대하지 않았거든요. 마녀는 자신을 쏘아보는 인어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할머니 인어 앞에 손을 잡고 있는 왕자와 인어공주에게 다가왔습니다. 할머니 인어는 마녀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습니다. 마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인어와 인간이 결혼하는 최초의 결혼식에 빠질 수는 없죠.”라고.     


결혼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인어와 인간의 결혼이라니, 바다의 왕국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할머니 인어는 웅성거리는 분위기 가라앉힌 후 인어공주에게 사실대로 말하라 했습니다. 인어공주는 왕자가 약을 먹고 인어가 되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죠. 하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할머니 인어는 불같이 대로했습니다. 결혼식을 당장 멈추고 왕자를 지하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인어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매달려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날 밤, 인어공주는 마녀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 따져보았지만 마녀는 깔깔 웃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죠. 인어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왕자가 물거품이 되지 않는 방법을 알려달라 하였습니다. 마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주머니에서 새빨간 약을 꺼내었습니다. 이 약을 왕자에게 먹이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만 인어공주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게 되었죠. 인어공주는 울음을 꾹 참으며 약을 받아 왕자에게 돌아갔습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지하감옥에 가둬져 있던 왕자는 피폐한 모습이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약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인어공주가 없는 인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물거품이 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죠. 물거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인어공주는 계속 약을 건넸지만 왕자는 완강했습니다. 그저 자신을 안아달라고만 했습니다. 그들은 눈물은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고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왕자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인간들의 궁전 앞바다에서는 매일 밤마다 인어공주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지금까지도 바다를 맴돌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좋은 생각>에 글이 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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