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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Aug 05. 2021

소녀의 선물


살이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눈발이 무섭게 날리고 있었다. 남자는 소매 끝이 다 헤진 얇은 코트를 여몄다. 바람은 매정하게도 그의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크리스마스.”     


남자는 중얼거리며 연말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집들에서 새어 나오는 환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게 하는 맛있는 냄새가 거리에 가득했다. 화목한 가정의 따뜻한 대화와 웃음소리. 남자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도, 돈도, 사람도, 사랑도.     


어릴 적부터 글솜씨가 남달랐던 그는 자연스럽게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한 평생 글 하나만 보고 살았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멋진 책을 내게 되는 날을 꿈 꾸며 밥 먹고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글쓰기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가려고 하는 길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투고하는 글마다 전부 퇴짜를 맞았다. 처음에는 이 정도의 실패는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열정으로 빛나던 그의 눈에도 그늘이 졌다. 실패가 거듭되자 그는 자신의 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가진 돈도 점점 떨어져 가고 남들과 비교되는 모습에 열등감이 생겼다. 오랫동안 곁을 지켜주던 사랑하는 그녀도 기다림에 지쳐 떠나가버렸다. 그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슨 글을 써야 하는 건지 어떤 글이 쓰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얀 백지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흘렀다. 설상가상으로 언제나 그를 응원하는 어머니에게 큰 병이 생겼다. 당장 병을 치료할 큰돈이 필요했다. 글쓰기를 미루고 급하게 돈을 구할 일을 찾았다. 몸이 상할 정도로 밤새 일을 하여 돈을 마련했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눈앞은 막막했다. 자신을 버티게 해 주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매일을 술로 지새웠다. 이제 노트와 펜은 집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방치되었다.     


눈 덮인 거리를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남자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는 3개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담배 살 돈도 얼마 안 남았는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다른 쪽 주머니에 있을 라이터를 찾아 손을 더듬었다. 이럴 수가. 분명히 라이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담배 하나도 마음대로 필 수 없는 이 상황에 남자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불이 필요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에게 불을 빌려볼까 했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피했다.     


그때 남자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낡은 앞치마를 두르고 자신의 몸보다 큰 바구니를 낑낑거리며 들고 있었다. 바구니에는 성냥이 가득 담겨있었다. 부모도 없이 이 늦은 밤에 홀로 거리에 나와있는 소녀를 남자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소녀는 작은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의 눈에는 소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소녀는 지쳤는지 한 집과 옆집 사이의 구석자리에 앉아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마침 성냥이 필요하기도 했고,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 어린 나이에 차가운 겨울 거리에서 홀로 떨고 있는 소녀가 걱정된 남자는 소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바닥을 내려보던 소녀는 남자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눈은 푸르고 맑았다. 소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성냥 3개비를 꺼내어 남자에게 내밀었다.     


“아저씨한테도 성냥이 필요하겠어요. 성냥의 온기가 아저씨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거예요.”     


남자는 어리둥절한 채로 소녀에게 성냥을 받았다.     


“고.... 고맙다. 돈은 얼마를 주면 되겠니?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남자는 깜짝 놀랐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건넨 성냥 3개비만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한참을 놀라 가만히 서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까 피우지 못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벽에 그었다. ‘치직’ 소리를 내며 불꽃이 환하게 타올랐다. 불꽃은 따스했다. 꽁꽁 얼어있던 그의 몸이 마치 난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성냥의 불을 담배로 옮기려는 순간,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서있는 곳은 겨울의 거리가 아니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나른한 햇살, 선선한 바람, 삐걱거리는 흔들의자, 익숙한 냄새. 그는 단번에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그가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이었다. 동그랗게 커진 큰 눈으로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펜이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책들과 노트 사이에서 그가 글을 쓰고 있었다. 작가의 꿈을 갖기 시작한 어린 시절의 그가 행복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긴 시간을 의자에 앉아 펜을 놓지 않다가 잠시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천장을 보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그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뒤에서 지켜보던 남자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웠다. 다른 걱정거리 없이 오직 글 하나에 집중하여 살았던 그때가. 머릿속에 담겨있는 무궁무진한 소재와 가슴속에 품은 글을 향한 열정이 너무나 그리웠다. 다시 되찾아야만 했다. 남자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꽃이 꺼졌다. 남자는 원래 있던 거리로 돌아왔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고, 그의 손에는 다 타버린 성냥개비 토막만 쥐어져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성냥을 태우자 어릴 적 자신을 만나게 되다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잃어버렸던 어떤 감정이 꿈틀거림을 느꼈다. 소녀가 준 성냥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흐르는 눈물을 닦고 피우려던 담배를 멀리 집어던졌다. 그리고 두 번째 성냥을 벽에 그었다. 불꽃이 일어났다.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남자는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그는 큰 무대의 객석에 앉아 있었다. 객석에는 관객들이 가득했다. 무대에는 한 남자가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연을 하는 남자는 바로 그였다. 낡은 코트를 입고 있는 그의 차림새와는 전혀 다른 정장을 입은 모습이었지만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대의 그는 새롭게 발표한 소설과 함께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글과 나란히 걸어온 삶, 순탄치 않았던 시절을 견뎌내어 평생 꿈이 었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었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그의 강연에 크게 감명받은 것 같았다. 강연이 끝나자 기립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객석의 그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두 번째 불꽃이 꺼졌다. 남자는 숨을 헐떡였다. 심장 소리가 귀에서 요동쳤다. 첫 번째 성냥은 그의 과거를, 두 번째 성냥은 그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미래? 그가 본 것이 정말 성공한 미래의 자신이 맞을까? 허겁지겁 마지막 성냥을 찾았다. 이 성냥이 정답을 알려주기를 기대하면서 벽에 힘차게 그었다. 어느 때 보다 강한 불꽃이 일었다.     


남자는 여전히 눈 내리는 거리에 있었다. 성냥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불꽃의 춤을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꽃은 점점 크게 번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어머니였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녀가 그렇게 크고 아름다워 보인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걸음걸이, 미소, 냄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녀는 포근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그와 어머니의 눈이 마주쳤다. ‘그동안 힘들었지. 곁에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해. 나는 괜찮으니까 더 이상 내게 미안해하지 말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놓치지 마렴. 다시 불을 붙이고, 또 붙이면 된단다. 너에게는 무한한 성냥이 있으니까.’ 어머니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었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아이처럼 한참을 울었다.     


마지막 불꽃도 사그라들었다. 매서운 새벽, 눈 덮인 거리에 주저앉은 남자의 곁에는 다 태워진 세 개의 성냥이 남겨져 있었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는 성냥을 가슴에 모아 부둥켜안고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불쌍한 부랑자 이구먼.”     


사람들이 말했다. 하지만 지난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는지 그리고 푹 숙인 고개 아래에서 그의 눈빛이 얼마나 강하게 빛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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