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정 작용과 분노
시즌 1 PROJECTION
교정 작용
_
우리는 과거를 미증유의 원인 그 자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렇게 종종 과거는 원인이라 호명되고, 따라서 일견 미래를 예상하고자 하는 의견 대립에서도 이 원인으로서 가정된 가상의 미래 또한 하나의 과거로 간주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까닭으로, 일종의 기시감은 우리가 과거에 예상했던 오늘의 현실(결과)이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도래하는 양 보인다.
저와 마찬가지로 데자뷔는 방금 입력된 지각에 의해 찰나 간 '짧은 기억이 된 <현재>에 관한 기억'이, '기성 <현재>에 관한 기억'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오인지한 '느낌'이지 않겠나. 이는, 이 새롭게 입력되어야 하는 '짧은 기억이 된 현재에 관한 기억' 외에 별도의 '기성 현재에 관한 기억' 따위는 사실 이미 없었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러한 기시감은 지각과 기억 간의 오류가 아니라 기억과 기억 간의 오류로서, 기억을 다른 무엇(관성)과 혼동하는 경향성과 관련 있을 텐데, 이를테면 소위 '상상'이 대표적이리라.
실상 우리의 정신이 상상과 기억을 혼동하는 증상이 기이하다기보다, 도리어 상상과 기억을 구별하는 우리 정신의 기성 기능이 놀라울 따름 아니겠나. 거기서 우리가 추론하는 가상적인 경우의 수와 우리 앞에 닥친 현재를 구별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허물어진 경계는 꿈속의 그것처럼 우리 감각이 과잉 동작하도록 조작하기도 하는가 보다.
반대로 우리 상상이 제아무리 추론으로 정교화되더라도, 결코 절대적 현실에는 다다르지 못할 모양이다. 도리어 그 간격의 거리만큼 우리 정신이 '작동'하겠으니. 주요한 건 추론과 현실이라는 두 요소 사이의 괴리 자체가 아니라, 두 요소가 서로를 참조하고 있는 관계의 양상이며, 거기 아울러 그렇게 서로를 참조하더라도 결코 같아지지 않는 저 분리된 관계의 '지속적인 양상'이겠다. 거기서 추론은 상상으로 탈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을 따라잡으며, 현실 자체도 완벽한 인식이 영영 불가능한 가상의 도달지점으로써 우리 정신에 끊임없이 다시 설정될 터다. 그렇게 보면, 현실이라는 목표지점 자체 또한 미리 설정된 도달 불가능할 '절대적 현실'에 다가서고자 하는 불확정성의 또 다른 관념에 불과하리라.
한편, 그렇게 우리의 정신이 현실과 완전히 괴리된 현상을 발견했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가시적인 행위 없이 우리도 모르게 약속한 암시적 일관성인 '현실 인지'가 결여된 행동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이를 익살로 간주하곤 하지 않던가. 여기서 현실 인지로써의 일관성은 그저 인지능력일 수도, 사회적 합의 내에 있는 규범이나 예절일 수도, 따라서 과도하게 매몰된 경향성(자린고비와 같이 '편향'적으로 유형화된 인물)의 교정 작용을 하는 감수성일 수도 있을 터다. 이 교정 작용의 감수성은 너무 미묘해서 법이나 규범의 테두리 내에 들어가진 않을 적이 많겠으나, 그럼에도 여타 개인들 사이에 은근한 거리감을 서로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엔 충분한 양식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던가. 그렇게 살피면 데자뷔는 거꾸로 확인된 자기 자신에의 익살에 다름 아니리라.
그와 같이 교정 작용의 '감수성'으로서 풍자나 조롱 자체가 과도할 적에, 예의 교정 작용 자체가 다시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상 또한 흥미롭지 않나. 그리하여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비웃는 방식으로 자기 삶을 교정하기도 하겠다. 허나 서투르고 과잉된 교정 작용의 폐해로서 스스로 무대 위에 있다고 몰두하여 상상하기만 하는 습관은, 종종 예의 예상된 (비)웃음의 결과인 '교정'을 도출하기보다 그저 '수치심'만 유발하는데 그칠 적 또한 적지 않으리라.
죄책감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주인공은 되고 싶은 저 흔한 유아적 수치심은 종종 적개심으로, 다르게는 뻔뻔한 카리스마로 가려져 부정되곤 한다. 그렇게 죄책감을 느낄 수 없는 무능력은 그저 정서(예컨대 초자아)발달의 실패를 의미할 뿐이겠으나, 죄책감이 어떻게 부정되는지 살핀 후에 이를 다루어 하나하나 대처하고자 시도하는 건 무수한 군상의 정서발달 단계들을 일일이 고려하여 응대해야 하는 우리네 현실을 고려했을 때 필요한 기술이긴 하겠다. 그처럼 우리 삶의 많은 것(이를테면 '사회' 자체)들이 그 정당성 여부와 관련 없이, 그러니까 저 (피해자를 습관적으로 자청하는) 나약한 자기애적 가해자들의 발달 여부나 치료 여부와 관련 없이 그저 작동하고 있는 양 보이니까.
_
분노
_
굳이 정당성으로 치자면, 그리하여 관념적으로 자명한 '절대적' 정당성을 가정하고 추론하여 다다르고자 하는 시행착오의 '발달'에는 소위 '죄책감'과 '분노'의 발달이 아울러 포함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른바 자격지심이나 선민의식을 극복한 '절대적' 정당성을 추론하고자 하는 능력은, 죄책감을 포함하는 역지사지의 인식(추론) 능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여기서의 정당성은 '질투심'이나 '열등감',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등을 스스로 검열하고 고려한(극복하고자 하는) 정당성이겠으므로, 위와 같은 '자격지심'이나 '선민의식'을 반성하여 판단하는 달성 불가능한 노력을 그 뿌리로 삼을 터다. 따라서 '절대적' 정당성을 찾고자 희구하는 과정에서도, 감상적 호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닻은 다시 (달성 불가능할) (절대적) '정확성'(의 추구 여부)일 양이다.
이처럼 적확한 정당성을 위해서는, 상대의 상황에 당사자보다 더 과도하게 몰입하여 '이해' 이상으로 과잉 공감하는 건 도리어 걸림돌이리라. 다만 당 '이해'들을 무수하게 교차하도록 애써야 할 모양이다. 특정 상황에 과잉 공감하여 감상에 몰두하는 순간 정확성(가령 그게 대상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정확성'일지라도)은 벌써 흐려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확성은 누구에게도 이입하지 않고 대상을 하나의 '임의적인 타자'로써만 간주하는 능력, 그렇게 무엇과도 쉬이 동일시하지 않고 그 구조의 지형도를 이해하는 능력이리라. 또 그렇게 판단을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능력도 스스로를 '타자'로서 살피는 능력이겠다. 그처럼 자기 자신의 감상에 매몰되지 않는 능력, 그리하여 자기 '질투심'이나 '열등감' 등, 곧 '자격자심'을 극복하거나 자기 '선민의식'을 반성하는 능력 등은 타인에게 쉬이 이입하지 않은 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그렇게 타인의 호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호소에도 휩쓸리지 않고자 하는 훈련을, 우리는 어릴 적부터 '현실 인식'이라는 무늬 아래서 자기도 모르게 수행해 왔을 테니. 요는 도달했느냐 혹은 못 했느냐 등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을 해당 노력(발달)이 얼마나 진척되었느냐의 문제일 셈이고.
그렇게 질투심이나 열등감 등 본능적인 적개심이나 마찬가지로 적의에 찬 나약한 선민의식에 휩쓸리지 않은 판단 위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질투심'이나 '열등감'의 해소로서의 본능적인 '적개심'이나 '선민의식(가령 메시아 콤플렉스 등)' 따위가 아닌, 설령 도달 불가능할지라도 정확성에 기초한 '절대적' 정당성을 그 추구적 명분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소위 '분노'라는 명료한 개념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요컨대 '질투심'이나 '열등감', '선민의식' 등의 감상은 예의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분노'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해당 개념의 개인적 성립을 다만 방해하고 있을 테니.
자명한 개념을 토대로 한 개념으로서의 '분노'는, 정확성을 정당성(무조건적 주인공에 동일시하는 태도의 탈락 이후)까지 확장했다는 의미일 터다. 이는, 역지사지를 통한 모든 고려 대상의 성역 없는 평준화가 죄책감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당성의 전제인 까닭이다.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계는, 그저 본능적인 '적개심'이나 '선민의식' 덕택에 그저 '적개심(예컨대 피해의식 등)' 외에 제대로 된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한계와 동일한 원인을 가질 테니. 여기서 죄책감과 분노(이른바 발달에 성공한 적개심) 둘 모두의 근거가 되는 디딤대는 정확성을 기초로 한 '절대적' 정당성에의 추구 여부이며, 거듭 그 배역이 바뀌는 바로 옆 사람과의 반복되는 비교 의식에 기원한 유아적 경쟁 여부(자기애-나르시시즘)가 아닌, 추상적 가치관을 경험적으로 타진하여 쌓아 올리며 이를 위한 (종국에는 무한으로 번져야 할 이) 한계를 극복할 의지가 있어 왔고 또 앞으로 있을지의 여부(초자아)와 관련 있다.
허나 정확성이든 정당성이든 저기 저 '절대성'에는 누구도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을 요량이니. 이는 둘 모두 실로 그 출발점부터 주관의 영역인 까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정확성(현실 인식)을 설정하여 하염없이 접근하고 그 위에서만 정당성을 추구해야 나름의 유효성에 그나마 다가갈 수 있지 않겠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