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절대적 현실과 당위 담론
시즌 1 PROJECTION
절대적 현실
_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지하는 게 우리 감각이 자기 한계만큼 지각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지각하는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각자 현실을 다르게 느낀다면 소위 절대적 현실은 그저 가설에 불과한가? 그렇게 세계에는 상대적인 현실뿐인가?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상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 절대적 현실을 각자 상대적으로 느낄 뿐일 테니. 요컨대 상대적인 건 우리네 개별 지각과 관념의 세계에 불과하지, 모두가 도달하고 사용하고자 방향 지어진 공통 세계 자체가 모조리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우리끼리 조차 소통할 수 없으리라. 절대적인 현실에 상대적으로 도달하고, 따라서 각자의 지각만큼만 현실을 느끼며, 각각이 그린 나름의 상상적 도식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는 한계를 가졌을 뿐이다.
가령 같은 정경 앞에서 우리가 보는 장면과 뱀이 보는 장면이 다르다고 해서 무엇이 가짜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허나, 이 뱀은 추상적 진실에는 다가설 수 없으리라. 우리는 우리 지각에서 공통된 바의 감지된 감각 외에 다른 걸 추출하고 추론해 낼 수 있다. 이른바 추상적인 도식이자 경험적인 가설이겠다. 우리는 절대적 현실에 도달할 수 없지만, 예의 추상적인 가설을 통해 그 현실을 가정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는 있으니. 허나 이를 위해 우리가 도달하고 사용하는 현실이 매번 절대적일 필요는 없으나 필연적일 필요는 있다. 우리 정신의 상상이 끝내 추론으로 발달하려면, 고로 유효성(설령 그 유효성이 풍부한 상상력의 과시일지언정)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적 객관성에는 다다를 수 없더라도 필연성(가령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상상까지도 이 필연성에 포함될 터다)을 바라보기는 해야 할 양이다.
이런 필연성은 인과관계와 함께한다. 무수한 저 인과들의 교차로에는 비유나 은유(여기서의 비유나 은유가 유효성의 원리가 아니라, 유효성의 원인이거나 결과라는 의미에서)로 다다를 수 없는 유효성이 있을 텐데, 가령 감동이라는 정서적 반응 또한 어느 인과(이를테면 유효한 비유나 은유가 원인이 되는 인과 등)의 결과이기도 하리라. 그렇게 일상의 사건들을 재차 귀납하고 연역하는 행위는 곧 필연성에 다다르고자 하는, 따라서 일상을 분석하여 개선하고자 하기도 하는, 나아가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실천 아니던가.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요소에서 필연성의 뼈대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우리네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끝나지 않을 노력인 동시에 절대적 현실에 도달하고자 영영 방향 지어진 시행착오겠다.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적 현실에 끝내 도달할 수 없겠으나, 개별 구체적 상황에 대한 유효성에는 도달할 수 있겠다. 또한 다수 유효성의 교차로에 있는 필연성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지 않겠나. 따라서 우리는 뱀의 시각이 우리의 시각보다 얼마나 풍요로운지 등 자의적 관념 기준에 근거한 우열을 '굳이' 나누는 게 아니라, 두 시각의 '차이'를 구별(인지/긍정)해야 하리라. 고로 어떤 차이가 어느 유효성과 관련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감동과 다른 감동의 차이 또한 귀납하고 연역할 수 있을 터다.
귀납과 연역이라는 두 정신적 노력의 양식은 상호 의존적일 텐데. 연역으로 검증되지 못한(할) 가설이 귀납의 영역에서 그저 은유나 비유를 선고하는 데 그치듯, 귀납으로 설정되는 최초의 가설 없이 연역이 동작하기 요원한 까닭이다. 허나 노력의 두 양식은 유효성에 접근하고자 각 상황의 무수한 요소를 달리 자르고 종합한다는 점에서, 또 각자 필연성을 추론한다는 점에서, 마침내는 절대적 현실에 하염없이 다가서고자 바로 그 다가서려는 방식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검열적 관념 체계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우리는 늘 이토록 무수한 관념 체계 내부에 있을 모양이다. 그게 연역이든 비유든 귀납이든 은유든 간에, 문제는 그게 어떤 비유 무슨 은유이고 그래서 우리 정신이 이를 어떻게 활용하여 구조화하고 있는지, 비로소 그리 구조화된 우리 관념이 어디에 다다르고자 욕망하는지, 나아가 거기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이 성취되기 위하여 무슨 유효성이 필요한지겠다. 우리 관념이 일반(추상)적인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무수한 구체적인 것들을 거쳐야 하며, 그리 특수한 정신적 접근으로부터 마침내 일반 관념으로 되돌아 완성되기를 기대하며, 허나 그렇게 일반적 일상에서 분석을 거치면서도 끝내 실패할 완성을 영영 시도하며 그저 분석 자체를 하염없이 가공할 뿐이리라.
우리 최초의 거울상이 그저 우리가 되고자 하는 인물, 혹은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데 그치는 인물(이미지) 따위였다면, 우리 최후의 거울상(거울상을 극복한 거울상-(초)자아를 극복한 (초)자아)은 저기 저 '절대적 현실'에 도달한 인물, 고로 이론적으로만 도달 가능한 인물(경험적으로 유효할 만큼 충분히 추상적인 개념)이어야 할 터다. 우리 노력은 분명 우리의 거울상과 아울러 현실화되곤 하나, 여기선 '현실'보다 '현실화 능력'이야말로 하나의 가능성이자 기량으로 작용할 요량이니까. 요컨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끝내 도달 불가능할 서로의 관념적 현실 또한 망연한 상상 아닌 정교한 추론이 가능할 테니까.
우리 각자의 저 상대적 관념 현실은 확실히 다만 주관적일 뿐 아니라 끝내 서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겠으나, 그렇게 구성되는 각각의 정신적 세계가 비록 상대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었더라도 구축된 정신 자체는 절대적으로 작동하고 있겠으므로, 연역과 귀납으로 서로의 도달 불가능할 세계를 '당연히' 하염없이 접근할 수는 있으며, 거기서 '필연성(유효성)'을 임상적으로 건져 올릴 수도 있으리라. 그 또한 어느 차원의 '절대적 현실' 중 하나인 까닭에, 그렇게 서로의 정신에 하염없이 접근하고 이를 위하여 분석하여 추론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의 관념 현실도 스스로 예의 '절대적 현실' 중 하나로써 접근하여 다룰 수도 있지 않겠나. 요컨대, 발달단계 중 어딘가 위치해 있는 우리 거울상 자체를 '절대적 현실(극복해야 할 중간 단계로서 기성 현실)'로써 다루는 건 분명 '절대적 현실'로써의 거울상 자체(도달해야 할 목표로서의 절대적 현실, 거울상을 극복한 거울상, (초)자아를 극복한 (초)자아 등)와 다르겠으나, 전자의 단계를 밟지 않고 후자로 접근할 수는 없을 모양이니까.
그리하여 소위 '자연스럽다'는 형용가정법의 '자연'에 관한 기호(소산적 자연)가 권력을 남용하여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가장 극단적인 욕망 아래 발산되고 있는 이상으로, '절대적 현실'로써의 '자연' 자체(능산적 자연)도 도달불가능한 목적지로서 거울상((초)자아)의 최종 목적지를 지목하고 있을 테니. 우리가 도달할 순 없으나 접근할 순 있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기량을 가공하여 단련할 수 있는 과녁으로서, '절대적 현실'은 매 시점에서 재차 고려되는 가능성이자 필연성이겠고. 그렇게 '절대적 현실' 자체에 다다르고자 하는 노력은 마침내 우리 자신의 '(초기) 거울상'이 실시간으로 변경(극복)되는 지점으로, 따라서 고착된 서로의 '거울상' 뿐 아니라 그렇게 실시간으로 변경되는 서로의 '거울상'까지도 자명하게 분석 가능한 지점(경험적으로 유효할 만큼의 충분한 추상화될 수 있을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어 각자의 개별 분석 능력 또한 다시 예의 도달 자체(자아를 극복한 자아)에 하염없이 접근하게 할 터다.
_
당위 담론
_
소위 자연스럽다는 문장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자연'스럽다'는 저 어휘 속에서도 이미 형용의 대상은 자연이 아니니까. 요컨대 사회적인 관계도를 '굳이' 자연에 비유하는 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인 관계도' 자체가 '자연'만큼이나 절대적이고 자명하여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반지성적 호소의 습관적 증상에 불과할 테니. 허나, 실제로는 그 자연조차 당연하지 않은 논의의 대상이자 탐구의 대상이다. '사회'는 그러한 과학적 탐구 대상은 아니나 그게 과학적 논증이 아니더라도 사회는 각자 나름의 논의 방식(나름의 논증 체계나 약속의 체계 등)이 있고 그로부터 도피한 동어반복이, 합의된 문명 체계 위에서 그렇게 논의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딱 그만큼 '굳이' 성숙한 태도와 어휘를 가장하여 카리스마 넘치게 호소하려는 어떤 권력의지들은 무슨 유효성도 소유하기 힘들고 또 힘들어야 할 요량이다.
돌아보면, '자연스럽다'는 저 형용사는 그토록 오랜 기간 남용되는 권력의 변명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나. 이를테면 '양반'은 양반다워야 하고 '노비'는 노비다워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의 헛소리는, 그러므로 '산'이 산답고 '강'이 강다워야 하는 소위 '자연'의 이치에서 '애써' 근거를 찾고 있지 않던가. 여기서 작동하는 근거는 논증의 전제가 아니다. 논증 아닌 은유로써의 당 주장은 필연성을 결코 담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피해 간다. 기껏해야 결론의 '전달'만 시도할 뿐이다. 소위 권력 작용(남용)의 '이치'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저 뭉개고 지나가며 '관철'만 하고자 하는 저 태도의 뿌리에는, 설명 불가능한 동어반복의 모순된 욕망이 그저 '자연'스러움 자체로 부양되고 있지 않던가.
그리 덮어놓고 관철하고자 하는 대다수의 욕망은, 그렇게 논증에 실패하거나 또 논증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종종 통념에의 호소로 흘러든다. 그러한 통념은 너무나 자주 '다수결'의 이름을 도용하는데, 이를테면 4+4라는 과정이 투표를 통해 10이 되어버리는 현상과 유사한 결과물들이 얼마나 많이 목도되는지. 소위 자의적 공정성으로 '논증'을 대리하여 '정확성'을 의도적으로 폐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러니까 기묘한 열등감이 거기 있지 않나. 어느 분야건 '정당성'보다야 '정확성'이 우선 확인되어야, 차후 당 논리를 적용할 때 정당(공정)성 또한 고려될 수 있을 텐데. 그처럼 서글픈 감정의 영역에서조차 '정확'한 공감 혹은 '정확'한 포착이 차후 대응을 가능하게 할 모양인데도.
고로 '정확성'보다 '공정성'에 호소하는, 탐구의 절차적 '정확성'을 힘껏 배제한 뒤 결론의 호불호를 기준으로 민중이 투표하여 결정하는 민주적인 '지식'이라는 저 황당한 '이론' 혹은 '사실'들이, 그러니까 그토록 희한한 권력 남용의 '당연함'이라는 수단들이 얼마나 즐비하게 선포되어 왔던가 말이다.
자연스러움에 관한 담론은 어떤 이상(의도성 짙은 청사진)을 담보하기도 한다. 요컨대 인위적인 노력을 모조리 삭제하면 그 아래 순수한 천재가 살고 있으며, 고로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리 가정된 '신'적인 천재성을 무의식으로부터 스스로 끌어낼 수 있다는 신화가 그것이다. 어떤 면에서 무수한 종교들과 결부되기도 하는 이 경향성은, 끝끝내 노력에 대한 거부감이 혐오로까지 증식하였으나 이를 인정하기는 싫어 한껏 고상한 형용사로 당 혐오를 포장한 결과물일 뿐이리라. 설령 '신'적인 천재가 인위적인 번뇌 아래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태어난 그 순간부터 문화적으로 발육되는 오늘날 우리는 결코 거기 도달하지 못하고 또 못해야만 하도록 구성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거기 다다르고자 하는 환상은 실상 그 반대편에 있는 (소위 인위적인) 번뇌를 한 치도 직시하기 싫은, 그러므로 필연적인 노력의 사다리를 오르기 싫은 반작용(응석)으로서의 감상(말하자면 새로운 번뇌) 이상이 될 수 없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이미 존재하는 번뇌를 그저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당 번뇌를 명징하게 확인하고 분석하여 고도화하는 방법뿐이리라. 번뇌가 없다고 하염없이 자기 최면을 시도해서는 나아갈 범위와 그 현실 도피에 따른 부작용만 그저 힘차게 명징할 양이니.
우리는 혹자를 '정확하게' 분석하고자 할 때조차, 당사자가 기분 나빠할지를 우선 고려해 가며 분석할 수 없어야 한다. 저 모든 요소보다 '정확성'이 먼저 판단되고 난 이후에 그 나머지가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하겠으므로. 요컨대 그가 불쾌할지를 고려하는 순간은, 정확한 분석 이후에 당 결과를 전달할지 말지, 전달한다면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순간이어야 할 테니까. 상담으로 말하자면, 상담 자체는 분석 이후에야 맞이하는 상황이며 분석을 토대로 해야 하는 대응이겠다. 그게 어떤 사태든지 간에 사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 이후에야, 분석된 사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정당성 혹은 공정성에 대해 재차 그에 맞는 '정확성'을 토대로 분석할 수 있겠으니. 그러므로, 언제나 주요한 건 때마다의 적합한 종류의 '정확성'이리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