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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후일을 도모하는 사람이라면 저서와 논문으로 말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여느 저서에 등장했다면, 그리하여 그 저서의 주요 내용이 후일의 다른 저서에 관한 저술이라면, 최소한 그 저서의 주요 주제는 그저 호언장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예의 문장이 여느 논문에 기재되었다면, 최소한 그 문장은 아무것도 논증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혹 저 문장이 저서도 논문도 아닌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면, 대체 무슨 낯으로 등장하고 있는지 그 띨띨하고 수치스러운 등장에 의문을 가질 법도 하겠다.
가령,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이를 도발하고자 스스로 라이벌이나 숙적을 자칭하며 출사표를 던져 긁어 부스럼을 만들곤, 곧 자처한 궁지에 몰려 궁색한 변명과 함께 헐레벌떡 도망친다던가. 그래서 실은 저 문장의 주제가 <저서>도 <논문>도 아닌 <후일>이라던가. 이를테면 무수한 만화영화의 악역들이 기약하는 저토록 흔한 <후일>이라던가 하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으리라.
그리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는 스스로 도망친 게 아니라고 매번 다시 암시를 걸며 논변을 시작한들, 스스로 작성한 어떤 논문에서도 도무지 1 더하기 1은 3이 될 수가 없지 않던가. 논증은 언제나 도무지 자명한 전제에서만 연역될 운명이겠으니, 그 자명한 연역에서 도망치는 실천으로 출발한 학위가 과연 학위이긴 할는지. 도망이라는 명실상부한 조건이 예의 도망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당화한다는 이 기묘하고 흔한 모순은, 무수한 글들의 도입부에 전시되곤 하던, 수없이 자기연민에 찌든 저자들의 일기/논문들과 무엇이 얼마나 다르겠는지.
첫 문장에 이미 결론이 전시되듯, 상처를 매만지느라 삶이 완전히 소진되는 글들을 어찌나 자주 마주하는지. 스스로 자처한 억울함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학위>들이 서점에 어찌나 많이 발견되던가 말이다. 저기 전시된 억울함들은, 스스로 주목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그렇지 못했다고 돌려서라도 어찌나 많이 말하던지, 돌려 말했다 해서 도무지 모를 수가 없지 않던가. 그리하여 예술가들에게 가선 학문을 지껄이곤, 학자들에게 가선 감각을 지껄이는 미학자가 오직 더욱 지껄이기 위해서만 지껄이는 광경을 목도하곤 하지 않던가. 일상을 사는 이에겐 음악의 위대함을 지껄이고, 가수에겐 일상의 고단함을 지껄이는 여느 명예 음악인은 도대체 지껄이는 자체를 위해서만 열중이지 않던가. 더 지껄이기 위해, <후일>의 지껄임을 호언장담하는 저 지껄임들은 언제나 자기 상처와 흉터를 <우선> 지껄이며 이야기를 시작하곤 하지 않던가. 끝내 잊혀질 <글-논문-옹알이>들은 오직 동어반복의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그 비참한 웅변/학위를 반복하지 않던가. 더 많은 이들이 내 억울함에 주목하도록!
하기야, 극복보다야 하소연이 좀 더 쉽지 않겠나.
거기 붙들곤 하는 주제라 봐야, 학자들 학문에의 연역적 이해가 아니라, 학자들이 생전에 가졌을 태도를 <상상>하고 거기 동일시하는 따위 아니겠는지. <~의 외로운 등을 떠올린다>는 등의 문장과 같이. 학위를 위해 주제를 정하듯 학자를 고르는 일과, 동일시해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와 닮아 보이는 피해자를 어서 빨리 고르려는 일을 의도적으로 혼동하고 혼용하여, 저와 아울러 영웅이 되고자 형용사적 묘사를 덕지덕지 시도하는 것이다. 끝내 영웅적 자기 숭배로 귀결하고자 그토록 애를 쓰는 이 나름대론 어른스럽고자 하는 유아적 동일시에서, [연역]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으리라. 그저 세상(사태들)은 최대한 비극적이어야만 하고, 그리 세상이 비극적일수록 스스로 고상하고 영웅적이라 위로하고자 하는 일관된 양태만 발견될 뿐.
박사학위를 얻기 직전에 쓴 논문이 가장 날카롭다던 노교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글을 다듬을 적, 갈급한 만큼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내몰리기도 하겠으므로. 물론 얼마나 정당화를 하고 싶은지가 그 치밀함에 비롯되어 전시되기도 하지만, 같은 이유로 매몰된 정도에 비롯되어 전시되기도 할 텐데.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늘 중립일 수만은 없고, 또 각자의 결론은 다른 이에게 전시된 트라우마와 같은 상처와 흉터에의 공감을 강요하는 양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중립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욱 정교하고 정확하기 위해 도리어 스스로를 궁지로 내모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비로소 그 궁지를 벗어나 자기 흉터 밖으로 나가는 일종의 극복 과정으로서 살아내야 할 삶(현실) 자체가 이미 그토록 폭력적이고 흉흉한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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