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사용은 이미 본래적인 의미와 덧붙여진 의미를 구분한다. 이를테면 사회가 다수결의 권력으로, 혹은 국문학자의 권위로 구분해 놓은 사전적 의미 위에 은유를 통해 예외적인 의미가 덧붙는다. 은유는 용법의 본래적인 의미를 가정할지언정, 해당 본래적인 의미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 효과를 창출한다. 은유는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나아가며, 그렇게 다다른 '다른 의미'가 사회적 인정에 의해 다시 사전적 의미가 되었을 때, 그때 이미 은유는 은유가 아니게 된다. 은유는 유통되지 않은 방향으로 유통하는 것을 그 기능으로 한다.
메타포 또한 기존의 상징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자리하는 장소에 그 의의를 갖는다. 메타포는 하나의 쓰임으로부터 다른 쓰임을 추가하면서 더 추상적인 의미를 수집하여 스스로 재구성한다. 그렇게 메타포는 사용 자체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맥락 안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단어들이 점차적으로 다른 의미를 띄기 시작할 적도 있다.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사용되던 낱말들이 마지막 장에 가면 전혀 다른 의미를 띄기도 한다. 그처럼 사용되는 시점에서 이미 모든 문장과 낱말은 저 맥락을 덧입기 시작한다. 따라서 맥락이 누적될수록 거기 소속된 몇몇 낱말들은 점차적으로 메타포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메타포는 자의적 의미지만, 그 의미는 저자의 내면생활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당 문장이 현재 소속되어 누적되고 있는 맥락에서 비롯된다.
한편, 습관적 패턴의 은유로부터, 아직 사전적 의미가 되지는 못했으나 그 용법이 너무 관례적이라 소위 새로운 의미의 유통은 더 이상 아니게 될 때의 과도기적 상태에서 우리는 종종 '클리셰'를 마주한다. 그때 목도하는 건 새롭다고 할 수도 없을 만치 다수의 사용을 덧입지만, 그렇다고 다수결의 권력이나 국문학자의 권위에는 다다르지 못한 무수한 언어들이다. 가령 기록되지 못한 방언들이나 비속어들이 그러하다. 기성의 옷을 입지 못한, 허나 무수하게 활용되는 '메타포'들의 이 과도기적 상태는 그저 다수 권력의 강대함이나 기성 권위의 대단함만 증거할 따름인가? 그렇게 공적인 언어를 지명하는 힘이 일종의 '폭력'이라는, 그런 고발의 명분 외에 저 '힘'이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 그와 같이 사용은 되고 있으나 사회에 등록되지는 못한 상태는, 소위 권력이나 권위가 회고적이라는 걸 아울러 이르고 있다. 요컨대 '사용'이 먼저 있고 '분류'나 '정의'는 나중에 온다.
우리의 지성 또한 우리 행동 뒤에 온다. 우리 정신을 작동하는 일 또한 '지성'의 '행동'이라고 할 때, 이 '지성'을 다시 분석하고자 하는 '지성'이 다시 따라올 터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지성'은 다분히 회고적이다. '은유'도, '메타포'도, '클리셰'도 회고적인 분류일 따름이다. 보다 이전에 '사용'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회고 이전 '사용'의 상태를 지나친다. 말하자면 우리는 마음껏 '상상'한 뒤 각각의 일관성 아래 가공한다. 그처럼 추리가 되기 전 공상이 있다. 그처럼 정신적 수렴이 있기 전 정신적 발산이 있다. 그처럼 발산적 공상이 자유연상(관념)에 하염없이 가까워진다면, 수렴적 추리는 한없이 사유(현실)에 가까워지는 과정인 셈이다. 허나 자유연상이 하나의 창작이라면, 사유 또한 하나의 창작이다. 다만 전자는 즐거운 발산이고, 후자는 고통스런 수렴이리라.
그렇게 우리에게서 나오는 언어 중 다수가 회고되고서야 그 '의미'를 획득하곤 할지라도, 언어의 발화 시점에 우리 모두는 '사용'이라는 이름으로 '창작'을 하고 있듯, 회고의 시점에서도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창작'을 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서 '분석' 또한 지성의 사용이라는 명목으로 예의 '사용'에 통합될 수 있겠으므로, '지성의 사용으로서의 분석'에 대한 재차 '분석'이 가능하리라. 모든 분석이 당 분석에 대한 분석(미분)으로 미끄러지듯, 그 역 또한 가능할 터다. 모든 사용이 그 이전의 사용으로 추리되어 가정(적분)될 수도 있지 않겠나. 요컨대 은유 이전의 은유, 발상 이전의 발상, 저 '사용' 최초의 지점에 극단적인 우연성이 확인된다면, '분석' 최후의 지점에는 극단적인 필연성이 확인되지 않겠나.
그렇게 필연이 우연들의 사슬의 관절 역할을 맡는다면, 우연은 일관된 필연들의 질료 역할을 하리라. 요는, 저기 우연과 필연을 동시에 긍정하는 데 오는 사슬(창작)의 재차 필연이다. 우리가 사후적으로만 사유할 수 있듯 소급해서만 사유가 가능하며, 거기서 우리는 끝끝내 '분석'하기 위해 이미 '사용'을 가정하는 중이고 또 가정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경청(분석)할 때 화자(사용자)를 가정한다. 그러나 역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사용)할 때 청자(평론가/분석가)를 고려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모든 사용은 얼만치는 분석이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리라. 우리의 '사용'은 본의 아니게라도 '분석'을 고려하고 있다. 여기서 주요한 건 하나의 극단을 개념으로 선취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얼마나'의 비율이다. 과연 이것은 '얼마나' 사용이고 '얼마나' 분석인가? 그처럼 우리 정신은 언제나 '상상'과 '사고'의 어떤 과도기적 '사용' 상태에 있다. 이를테면 은유와 메타포와 클리셰 사이를 모호하게 왕래하는 어떤 용법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