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초코 케익이 먹고 싶다
시즌 2 SIGN
‘초코 케익을 먹고 싶다’라는 명제에서 ‘초코 케익’이 사회적 상징을 지시한다면, 그리하여 무엇을 ‘초코 케익’이라고 부를지, 어디에서 얼만치나 해당 명사의 의미 범위를 한정할지를 은연중에 우리는 약속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 명제의 화자는 ‘초코 케익’이 아니라 그걸 먹는 ‘문화적’ 이미지를 선망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초코 케익’을 언젠가 먹어보고 싶었는데 지금 ‘배가 고픈’ 김에 먹어보고자 할 수도 있겠다. 허나 다시 ‘초코 케익을 먹고 싶다’는 기본 명제로 돌아가 보자면, 화자의 상태를 지시하는 건 ‘초코 케익’이 아니라 ‘먹고 싶다’에 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라는 자기 감각에 대한 최초 긍정(인식)은 ‘~을 먹고 싶다’로 번역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번역된 명제의 대상(초코 케익)을 ‘굳이’ 찾는 건 상태 이후 보다 사회적인 욕망을 빌려온 진술일 터다.
따라서 언젠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초코 케익”이 먹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한다면, 감각에 대한 최초 인식(최초 긍정)은 소거되고 사회적 욕망(2차적 긍정)만 남은 상태로 볼 수 있으리라. 모방에 기초한 이 사회적 욕망의 대상은 과연 어떤 이미지로 부양되고 있나? 어느 광고를 보았는지, 또는 어떤 지인의 추천에 혹했는지, 나아가 그렇게 형성되었던 패턴 혹은 문화 속에서 유사한 무슨 맛(뉘앙스)에 익숙해졌는지(습관) 등. 그리하여 사회적 욕망, 즉 긍정 혹은 부정으로서 판단되는 저 이미지는 최초 긍정(인식)의 사후적 흔적에 연원한다. 이를테면 사회적 욕망은 판단에 대한 판단이자, 최초의 긍정에 대한 긍정, 혹은 최초의 긍정에 대한 부정이므로.
부정으로 보자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우선 코끼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우선’ 우리 정신은 ‘필히’ 긍정(인지)한다. 그렇게 예의 1차적 긍정(판단) 위에서야 다음 판단을 시도할 수 있을 터다. 소위 무의식이 부정을 모르는 건 그런 덕택이다. 때때로 강한 부정을 위해서는 강하게 대상을 떠올려야 하는 양, 결국 강렬한 도피(환각)는 강렬한 인정(현실)에 기반할 수도 있는 셈이다. 그처럼 존재 유무의 판단이 먼저 있고 차후에야 선악의 구별(판단)이 뒤따른다. 허나 우리 정신이 ‘현실’을 인정하기 싫을 때, 이 순서는 종종 ‘도치’된다.
이런 ‘도치’에서 선악의 판별이 사실 판단보다 우선하는 사례 또한 흔히 목격된다. 이를테면 저 원시적 선악의 흑백 논리를 유아기 거울상에 기초해서 살필 수도 있으리라. 거울상은 호불호를 판별한 후 좋은(ex 선한) 이미지는 자아로 받아들이고, 싫은(ex 악한) 이미지는 대상(사물이나 인격)으로 투사해 버린다. 가령 질투하는 건 무조건 상대방이고 스스로는 절대적 옳음에 기초하는 주인공이라는 상상을 현실로 힘껏 인식하려는 등, 이상적인 (그러나 이념의 단계를 지나친 초자아만큼 추상적이지는 못한, 따라서 그저 이념의 단계 이전 이미지로서의) 거울상을 만들고 그 근방을 떠도는 거울 단계에 있는 유아기 자아는 그렇게 투사 기제를 환각적으로 소유한다. 최초의 앎이 아니라, 이를 전제로 한 감정적 판단이 다시 예의 ‘최초의 앎’이라는 전제를 종종 무너뜨리곤 무의식으로 밀어 넣어 애써 ‘부정’하곤 하는 모순적 판단이 바로 거기 무수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처럼 1차적 인지 기능은 일단 ‘긍정’이고, '부정'은 2차적 투사 기능 중 하나일 텐데. 그렇게 '부정(투사)'은 '긍정(현실 인지)' 위에서 재차 작동하는 사회적인 판단 기능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1차적 판단은 감각에 기초해 필연성과 함께 전개된 관념(들)이다. 그러나 2차적 판단은 처음부터 관념에 대한 관념이고, 그렇게 여타 다른 판단을 기초로 ‘호불호(쾌락 원칙의 흔적)’와 함께 전개된 재차 판단이다. 그런 판단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인 영향력(가령 유행)에 (종종 무의식적으로, 혹은 거기 반하는 방식으로라도) 의존한다. ‘선망’이나 ‘질투’ 등의 모방 심리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사고는 개인의 관념에 관성을 부여하여 자꾸 염색한다. 이런 덕택에, 종종 자명한 관념(이를테면 덧셈이나 곱셈조차)들 또한 미묘하게 불투명해지곤 하지 않나. 덧셈이나 곱셈의 정답은, 그게 제아무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전개라 하더라도 투표(투사)로 결정될 수 없듯, 유행(투사)으로 결정될 수도 없을 모양이다.
그렇다고 예의 2차적 판단(사회적 욕망)이 오직 상대적이기만 할 요량인가? 그렇게 1차적 판단(긍정)과 2차적 판단 각각에 대해 하나가 완전히 절대(객관)적이고 나머지가 완전히 상대(주관)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우리 감각조차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지만, 이는 우리가 의존해 있는 감각 기관(관찰자)의 ‘차이’지, 감각 기관을 통해 느끼는 대상 자체의 차이일 수는 결코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예의 ‘판단에 대한 판단’, 그러니까 2차적 판단에도 각각의 개별 과정적 구조는 있을 터다. 이는 ‘타인’의 1차적 판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론’을 다시 하나의 요소로 삼는 판단의 ‘정확성’에 관한 문제다. 가령 눈앞에 있는 누군가는 무얼 근거로 또 어떤 미묘한 일관성 아래에서 ‘초코 케익’이 맛있다고 판단했고, 나아가 그가 맛있다고 판단하는 대상들이 어떤 식감을 공통된 무늬로 지니고 있는지, 또 그처럼 어떤 대중이 선호하는 취향의 일관성은 소위 어떤 ‘결핍’에 근거하고 있는지 등. 이렇게 분석된 결과에 대한 ‘호불호’에 앞서서 해당 결과를 인지하는 한에서 우리는 이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는 1차적 판단(긍정)에 속하도록 노력(분석)할 수 있을 모양이다. 그러므로 2차적 판단이든 1차적 판단이든, 우리가 ‘정확성’을 기한다고 할 때 해당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 중 ‘상대적’ 요소보다 ‘절대적’ 요소를 기준으로, 그러므로 설령 희미하더라도 필연성(절대성)을 찾는 방식으로 수렴(노력)할 수 있고, 이를 통해 1차적 판단으로 어느 ‘정도’는 가져올 수도 있지 않겠나.
요컨대 모방조차 정확한 분석을 기초로 하(였다고 믿)고자 할 테니까. 이를테면 대중 다수가 어떤 이미지로 보여지기 원하는 선호(유행)를 일단 덮어놓고 모방하는 바와, 왜 해당 이미지에 집착하는지 분석한 후 공적, 사적 삶의 여러 상황에서 필요할 적마다 이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건 분명 다른 접근 방식이므로. 다채로운 ‘상징’에서 과잉된 감정을 솎아내어 ‘기호’로만 이를 살피고자 하면, 그제야 비로소 이를 전개(연산)하여 사용할(살아갈)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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