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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Feb 09. 2024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리뷰

당연한 이야기겠으나, 굳이 역사 너머 목민관의 윤리를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집단이 (뛰어난 소수를 위한 숭배가 아니라) ‘효율(효과)’을 위해 탄생했음을 쉬이 짐작할 터다. 요컨대 (비록 그 구성 방식이 개선되어 오기도 했겠지만) 의사 결정권을 소수에게 맡기고 나머지 개인들이 일사불란한 절차를 따라 움직이는 집단의 형성이 가져오는 효율(효과)은, 실로 유구하게 그 능력에의 증명을 갱신해왔다. 다만 (표면적인) 문제는 그 능력을 어떤 절차로 내어놓는가였겠다. 그렇게 해당하는 개별 절차는 각 이념을 만들고 또 따르며, 끝내 각각의 완고한 체계를 구성해왔나 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 무슨 진영도 각자의 이념에 따라 순순히 구성될 수는 없었던 셈이다. 예의 이념은 그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명분이었을 뿐, 어차피 각자가 추구하던 건 어디서나 권력 아니었나. 권력을 더욱 만천하에 과시(남용)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이를테면 굳이 어른스럽게 아우르려는 행태를 포함한) 온갖 권위가 복종에의 증명을 무수한 관계자에게 강요하여 왔으니. 그러한 남용(만끽)을 미시적인 부분까지 강제로 규제하지 않는 한 (그러기도 불가능하겠지만), 아주 사소한 집단에서도 예의 부조리는 저 느슨한 규율의 행간을 비집고 나와 삽시간에 ‘전통’으로 군림해버리는 유아적 사태를 고금을 막론하고 갖은 장소에서 온통 목도할 수 있었고, 또 있을 예정이지 않은지.

그러니까, 체제 간 갈등 구역에서 우연히 발생한 ‘인간적’ 유대가 개별 체제들의 기계적 대응에 따라 폭력적이고 절차적으로 해체되어가는 이 서사를 다르게 읽을 수도 있으리라. 요컨대, 희생양들을 거시 체제 간 갈등의 제물이 아니라 그저 권력의 제물로 볼 수도 있듯. 그리고 그런 관점에선 ‘인간적’이라는 형용사가 습관적으로 수식하곤 하는, 말하자면 ‘우정(혹은 애정)’은 인간적이지만 ‘지배욕’은 인간적일 수 없다는 양(또 그래선 안 된다는 양)의 서술은 실로 인간성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는 양상으로써라도 편파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고로 희생양이 된 이들이 기계적인 체제의 제물이 된 과정(서사)에는 지배욕을 가진 ‘인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의 행태가 그저 머나먼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체제를 만들고 굴리며 나태하게 방관하는 주체 또한 결국은 다름 아닌 ‘인간’이니까) 생략되어 있지나 않을는지.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을 예외로 두지 않고 성역 없이 모조리 적용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무자비하게 굴리는 저 ‘비인간적’인 ‘절차(체제)’가 마침내 해체해버리는 ‘개인적 삶’이 ‘구태여’ 비극적으로 전시되는 순간부터, 이제 개별 인물이 지니고 있어야 할 ‘책임’이 마치 ‘비인간적’인 체제가 개인에게 강요하고 뒤집어씌우는 부당한 ‘죄책감’인 양 둔갑할 수 있기는 하였으리라. 그러면 속이 더 편해지긴 할 테니까.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비단 혹자의 권력의지가 아니더라도, 온갖 부조리한 상황이 우리 삶에 어찌나 차고 넘치는지 살피면 달리 말해볼 법도 하다. 삶의 아주 사소한 무엇도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결정할 수도 구성할 수도 없으며, 그와 다르지 않게 우리 욕망 또한 그저 과거에 빚진 채 작동하는 데 불과하겠으므로. 고로 알지 못하는 건 처음부터 욕망할 수도 없고, 같은 까닭으로 예방할 수도 없을 테니. 지나와 돌이키면, 알 수 없을 요소로 구성되었던 (그렇게 지나왔던 저 과거의) 미래 또한 그토록 많은 부조리를 떠안고 있지 않았던가.

따라서 당 서사에 악역은 없다 할 수도 있으리라. 맡은 직무에 책임을 다하고자 했거나, 엮인 관계에 신의를 다하고자 했거나, 그러므로 끝끝내 역설적인 건 그러한 비극을 온전히 끌고 들어올 만한 악의를 어떤 등장인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정황일 터다. 그런 덕택에, 그렇게 개개인이 촉발한 구조적 모순들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당사자를 되돌아 덮치는 사태 위에서 개별 인물들에게 인과응보라 빈정대는 건 다소 부당해 보이긴 한다. 우리 각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삶을 실천했건, 언제나 삶 대부분은 우리 의도와 전혀 관련 없는 그 나름의 작동 양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양이니. 그렇다고 이제부터 무기력하게 살아가겠다 원망 어리게 매듭짓는 상념 또한 무책임한 마침표이리라. 죄책감에 못 이겨 권총 자살을 하는 장면에서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다해 잘 살아가고자 애쓰느라 도리어 삶을 포기하는 데에까지 다다른 역설을 발견할 수 있지 않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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