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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Dec 02. 2023

도서 '아침 그리고 저녁' 리뷰

헛되고 헛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솔로몬 / 전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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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념은 연산을 방해한다. 아니, 정념 일반은 사고를 방해한다. 다시, 모든 정념은 ‘사유’를 방해한다.


가령, 우리 자아에 가까이 있다고 간주될수록 우리는 당 ‘사물’에 소위 ‘존재’를 부여하곤 한다. 달리 말하자면, 해당 기호에 ‘존재감’이라는 ‘정념’을 부여한다. 이때의 정념은 일종의 호의일 수도, 심지어 사랑일 수도, 혹은 증오일 수도, 나아가 복수심일 수도 있으리라.


감정(정념)을 일시적으로라도 저편에 접어두고 생각을 전개하지 못하는 건, 그저 감정적인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기호에서 감정이 일시적으로라도 분리되지 않으면, 기호 자체가 가지는 함의들끼리의 상호 연산(추론)은 일어날 수 없다.


기호들은, 혹자가 자기 정신의 수면 위로 이를 굳이 매번 발화하지 않더라도, 의미상의 교차로에 늘 대기 중이다. 기호들은 의미들을 유통시키는 통로이므로. 실로 기표가 기의에 그토록 쉬이 미끄러진다는 혹자의 문장들을 굳이 참조하지 않더라도, 기호라는 통로로 유통되는 ‘함의’에는 그저 의미(뜻)뿐 아니라 정념 또한 포함되어 있을 테니. 특정 기호에만 과잉된 반응, 혹은 특정 기호 외에는 모조리 과소되는 반응, 그러니까 하나의 기호에만 ‘정념’이 매몰된 채 반응하는 경향을 달리 말하자면 기호가 의미(정념)를 유통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리라.


유통에 실패한 기호는 그 함의에 있어서 ‘동어반복’적이다. 가령 정치적 색감에서 ‘함의’의 유통이 멈춘 개인은, 끝끝내 그 유통의 강제성이 그를 그 자신의 ‘변호’로 이끌어 가더라도 거기서 유통과 유사한 의미상의 함의는 ‘일방향’으로만 등장한다. 기호의 함의가 상호 피드백되는 게 아니라, 그저 고립된 마지막 정의상의 그 ‘정념’으로 나머지 기호를 모조리 해석하게 되는 건 이미 무슨 ‘증상’을 이룩하는 일일 터다.


그처럼 고립된 ‘함의’는 ‘정념’을 누적하는 경향이 있다. 더 정확히는, 여기 고립되는 건 ‘정념’이고, 유통을 거부하는 양 고립된 이 정념은 그 이상의 ‘함의’를 해석하는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힘껏 거부하곤 한다. 가령, 혹자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 필연적으로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하는 순간 가치관 자체의 고유성이 무너진다고 여기는 경향은, 저기 저 ‘함의’의 유통을 애써 거부하는 대표적인 고착 양상에 다름 아니겠으니.


기하학적으로 은유하자면, ‘원’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원의 성질, 반지름과 넓이의 상관관계라는 의미의 유통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자체가 어떤 신성의 ‘해체’라고 가정하는, 어떤 불온한 신성모독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성이 바로 이 ‘정념’의 고립, 고로 의미의 고립일 수 있다. 표현에 대한 표현, 설명에 대한 설명이 비로소 멈추는 자리, 성역 없음이라는 의미상의 유통이 완전히 거부되는 어떤 꽉 막힌 성역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건 타협 불능의 어떤 가치관이자 ‘권리’로 과대평가 되는, 그저 ‘감정들’이다. 이 정념들에 관해 오늘의 감수성들이 철두철미한 도덕의 가면을 덧입고 다방면으로 요청하는 건, 그리하여 ‘무조건적인 존중’이리라.


그처럼 모순적인 뿌리 감정, 감히 설명되거나 논증되지 말아야 할 어마어마하게 신성한 저 정념을 가지지 않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실상 우리 논증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바로 이 정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정신 구조의 밑바닥에서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이 모순적인 뿌리 감정을 가진다. 과연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모순적이다. 누구도 결코 그렇지 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문제는 ‘언제나’와 ‘누구나’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 감정이 해체된다고 해서, 설명된다고 해서, 그처럼 ‘모욕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 뿌리 감정을 제거할 수 없다. 끝내 해체된 후에조차 ‘언제나’ 이전과 같거나 다른 뿌리 감정에 의존해 사고하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그 뿌리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저기 저 정념들을 해체하는 비평가들조차 어떤 정념일지라도 그런 뿌리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다시, 저와 같은 뿌리 감정은 사고를 방해한다. 이를테면, 그게 덧셈이든 곱셈이든 셈이 되는 대상인 ‘숫자’에 너무 많은 뿌리 감정이 깃들어 있다면 셈을 할 수가 없는 바와 같이. 그러니까, 숫자마다 일일이 감동하고, 슬퍼해서야 이 숫자를 연산한 결론을 시뮬레이션하는 건 요원한 일일 양이므로.

따라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검토하기 위해선 ‘존재감’을 일단 배제해 두어야 하듯, 자아를 바라보기 위해서 자아에 관련된 정념들을 미리 구분해 두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뿌리 감정을 살펴보는 건 이미 불가하기는 할 양이다. 소위 언급되는 ‘거리 두기’가 뿌리 감정의 정의상 전제부터 불가한 까닭이다.

허나, 이 모순 자체는 사건•경험적으로 인지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기호에 대해, 어떤 감정에 대해, 무슨 정념에 대해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다는 사태 자체는 검토될 수 있다. 사태 자체에 대한 거리 두기는 사후적으로든 사전적으로든 가능하다. 그렇게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우리네 뿌리 감정을 검토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화두는 현실적으로 자기 뿌리 감정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느냐에서, 설령 그것이 불가능할지언정 그리 검토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노력과 역량의 정도(강도)로 옮겨갈 수 있으리라. 요컨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분석’과, 그리 불가능한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위 [가치관에 대한 ‘가치관(태도)’]은 공생할 수 있겠으므로.

저 공생을 통해 비로소 마주하는 건, 여전한 우리 추구 각자의 과녁이 어마어마하고 우월하며 세계를 단박에 종합하는 무엇이 결코 아니라, 도리어 그저 무수히 많은 욕망 중 어느 하나에 불과하다는 이 허탈한 앎 정도다. 허나, 스스로 추구해 보지도 않은 어떤 가치로부터 바로 이 ‘공허’에 다다랐다고 연설하는 건 얼마나 쉬울는지. 돈과 권력을 추구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것이 공허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앞서 언급한 뿌리 감정에 다다랐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돈과 권력에 대한 앎을 통해 ‘공허’에 다다르는 건, 바로 그러한 돈과 권력에의 가치를 뿌리 깊게 추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경로다. 마찬가지로 어떤 깨달음을 통해 공허에 도달하는 걸 자기 욕망 삼는 사람은, ‘돈’과 ‘권력’ 혹은 ‘자본주의’와 아무 상관 없이, 바로 그 깨달음이 헛되다는 재차 깨달음을 통해서만 공허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오직 공허는 그 자신이 뿌리 깊게 추구했던 대상에서 그 정념이 떨어져 나오는 경험을 통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무슨 이념도 추구하지 않은 사람은 최소한 그 추구 경향을 결코 초월할 수도 없다. 질투한 적이 없는 사람이 질투라는 감정을 초월할 순 없는 법이다. 무지와 깨달음, 무관심과 공허는 거기서 분기되는 셈이리라. 물론, 뿌리 감정은 해체되면 다른 곳에서 자기도 몰래 소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이 헛되다고 주장하는 자칭 현자들을 무수하게 마주하곤 하지만, 실상 뿌리 감정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을 텐데. 그저 할 수 있는 건, 해체한 뿌리 감정이 다른 곳에 소생하는 사태 자체를 매번 주시하고 또 매번 다시 도달하여 해체할 수 있을 뿐이므로. 언젠가 심연에 직면했다고 해서 이제 직면하지 않아도 직면했던 바로 그 과거 역량이 지금 이 자리에 때마다 다시 현현할 수는 없겠으므로. 우리는 매번 다시 직면해야 한다. 선대의 학자들이 논증했던 명제들이 오늘날엔 수집된 권위로 퉁 쳐지며 서열 매겨지는 게 아니라, 오늘의 학자 당사자의 손으로 ‘매번 계속해서’ 다시 분해되고 논증되어야 하듯. 비로소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건, 예의 ‘지속적인 극복’의 역량이리라.

매 순간 저 공허 근방을 떠돌기 위해선, 가령 그러한 유일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이 미증유의 거듭될 극복을 위해 우리는 늘 꽤나 많은 환멸의 인내를 필요로 하겠으나, 그럼에도 그 공허 근방을 떠돌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구나’ 이렇게 ‘헛되고 헛되다’고 연설할 수도 있겠고, 어쩌면 이는 무엇보다 명석 판명한 우리네 닻이 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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