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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Oct 26. 2023

영화 '랑종' 리뷰

표준국어대사전 / 영매: 신령(神靈)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과 의사가 통하여, 혼령과 인간을 매개하는 사람. 곧 무당이나 박수가 이에 해당한다.

요는 ‘자연’ 질서에서 벗어난 초자연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난 여타 다른 ‘질서’일 터다. 그러니까 사실상 주목하게 되는 건 ‘자연적 질서’에서 벗어났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질서’에서 벗어난 바가 아니던가.

현실을 ‘굳이’ 초과(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닌, 이처럼 현실과 달리 조직되었다고 주장되는 세계관에 대해 말하자면 이 또한 어차피 현실에의 정의를 토대로 이루어진 셈일 텐데. 저기 저 주술의 질서가 초과한 것이 결코 ‘자연’ 현실일 리 없으므로. 달리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그저 ‘자연’ 현실에 불과하지는 않으므로.

이를테면 태어난 순간 지급되는 (주민)등록번호는 ‘자연’과 하등 상관이 없다. 물론 어떤 종류의 필연성(의무)이 거기 내재되어 있을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자연’적 필연성이 아니라 집단적 약속의 강제성에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가 문명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인지 아직 알 수 없을 터다. 우리 (자연적) ‘본능’이 집단(군집)의 약속 체계(규범-문명)를 어디까지 ‘자동(본능적)으로’ 생산해 내는지 알 수 없는 덕택에, 문명 내부에서도 자연과 지성의 구체적 경계를 추적하여 논증하기란 실로 여전히 요원한 일일 모양이니.

어쨌거나 우리는 약속의 체계 내부에 사는 중이다. 이 거대한 명령체계는 우리 각자가 태어나기 전 이미 그 골격이 완성되어 거부할 수 없는 관성을 이루고 있던 셈이다. 예컨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의무 교육 또한 자연 자체라기보다 주술에 가까우리라. 그건 집단의 판단과 전통에 기인한, 심지어 집단의 이름으로 구태여 구성원인 당사자의 미래를 한껏 걱정하는 예언자적 명령(충고)을 포함한다. 또 종종 우리는 먹고살 만한 이상의 우월감을 원한다. 그처럼 혹자는 어깨가 솟는 자랑스러움만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붓고는 한다. 이 자랑스러움은 오로지 집단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관을 그 양식(근거)으로 삼으며, 그로부터 거기 의존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득(통장 잔고 등)이 따라붙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동기들은 이미 주술적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적 가치관의 명령어를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 어떤 창의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저 획일적인 과녁을 애써 적중시키더라도, 그때 달성된 주된 심리적 이득은 오로지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약속’에 누구도 예외 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겠다. 심지어 흔하게 공모된 예절들, 온갖 예식장에서 들러붙는 압력선들은 각 예복의 구체적인 범위를 명령하듯 이미 출발한 ‘약속’의 관성(전통)을 명령한다. 우리가 스스로 동의하기도 전에 정해지고 계승되어 별다른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고 주로 자기 경로에 의존하는 이 약속의 범위, 의무의 통념들은, 어쩌면 얼마간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비로소 우리가 온갖 현상을 해석하는 기준 질서가 되어왔을 모양이니.

이때 우리가 해석하는 건 ‘자연’이 아니라 집단(군집) 내 개인 간 상호작용이다. 거기서 작동하는 해석의 규칙들은 규범이나 예의, 법, (추론된) 타인의 감정, 통념(상식-가상의 관객) 등에 불과하리라. 즉각적인 필연성을, 혹은 즉각적인 처벌을 꼭 담보하지 않는 이것들은 각자의 사소한 가치관에 의존하기도 한다. 가령 명성이 제 1가치인 개인과 재산이 제 1가치인 개인이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 상호 간 의사소통의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건, 각자 소속되어 있다고 믿는 ‘(준거)집단’이 다른 까닭이고, 따라서 의사소통의 기준이 되는 관념의 질서가 다른 까닭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실증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해석(상식 혹은 통념)이 다른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해석은 그들 자신의 감정(존재감 등)에 대해서는 특히 극도로 실제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런 제도나 규범, 법, 가치관 등 ‘주술의 규칙’은 종종 특정한 필연성을 담보하기도 한다. 설령 그게 ‘자기 최면’을 매개하는 경우든, 혹 자주 그렇듯 ‘집단의 압력’을 매개(대표성)하는 경우든 굳이 자연 자체의 인과적 현상과 상관없는 필연성이 기어이 거기 기입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도한 탈선 끝에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고립될 수도 있으리라. 반대로 사회적 가치관을 답습하여 얼마간 행복할 수도 있고, 재차 행복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도 있으며, 실상 저 가치관이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과 근본부터 다르다는 걸 ‘소위 언급되는 행복’의 성취 이후에야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같은 ‘주술’의 필요는 그 필연성의 ‘논증’이나 확증된 이득으로서 결과가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 등 사용 자체의 효과(경로의존성)에 기인한다.

해석(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도, 다만 설명하는 느낌만 가져올 수 있다면 이 행위는 실로 불안을 잊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째서 저 의자를 의자라고 명명하는가? 과연 그게 합의의 결과라면,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합의한 결과가 맞긴 한가? 고로 저 의자를 의자로 명명하는 이가 대표(대리)하는 게 ‘집단’인 경우와 ‘전통’인 경우, 또 ‘영혼’인 경우와 ‘정령’인 경우 간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가령 제도나 규범, 법, 가치관 등의 주술에 대한 물리학적인 접근이 비유나 은유 없이 가능할 리 없으니. 영혼이나 정령에 대해 그런 것인 양, 그 또한 포함해서 이런 주술들은 관객의 믿음 체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와 같이, 온갖 주술은 최소한 둘 이상의 관계 위에서야 작동할 텐데. 그렇게 보면, 주술을 ‘수행하는 자’와 그 효력을 믿는 ‘관객’이 동시에 주술 그 자체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실상 주술 그 자체의 효력(역량)이 주술을 믿는 관객에 의해 구성되는 까닭에, 주술이 그저 호소에 그칠 양인지 혹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도록 집단을 끌어나갈지는, 주술의 입법 과정 중에서도 특히 ‘관객’의 응답 양상에 달려있으리라.

관객은 사회적 약속을 매개로 의사소통하고, 거기에 효력을 부여하며, 그렇게 전통(판례)을 생산하여 적용해서 판결하는 등으로 저 ‘실천’을 강제(이를테면 형량의 선고)하기도 한다. 고로 주술의 생산과 사용 자체는 하나의 다짐으로 시작하고, 어떤 호소로 전개되며, 끝끝내는 기성 약속의 체계에 편입되기 위한 권력 의지로서 그 성취 여부가 마무리될 터다. 주술의 생산(사용)자가 자기 주술을 얼마나 믿는지와 관계 없이, 오직 저들 관객이 그의 주술을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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