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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Oct 22. 2023

도서 '죽음의 미로' 리뷰

느낌에서 개념으로

시뮬레이션에 접속한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프로그램 속 세계에 자기 내면을 각기 투사projection하고 있다. 한편, 그와 아울러 원하는 ‘이미지’를 자기 자신에게 내사(역-투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합의된 시뮬레이션 속에서 기억을 지우고 매번 새로운 서사를 채운다. 억겁의 시간, 매 서사가 완성될 때마다 그들이 재차 시도하는 건 새로운 시뮬레이션(서사)이다. 어쩌면 그들이 시뮬레이션 밖으로 나와 대화를 한다고 믿는 그 순간조차 하나의 시뮬레이션일지 모르겠다. 혹은, 바로 그것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남기며 총체적인 서사는 그 마침표를 찍는다.

세계를 일종의 시뮬레이션에 비유한다면, 그렇게 저기 저 세계가 등장인물의 관념을 참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자의적 관념들만을 자료로 구성된다면,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식의 투사나 꿈을 꾸면서 이미 꿈을 이룬 양 벌써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식의 평행우주를 내사하는 ‘열심’을 얼마만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저자는 오직 투사와 내사 기제만으로 세상을 보는 모양이다. 마치 개념을 구성하고 인식하기 이전의 유아가 느낌(상상)만으로 모든 걸 환원해서 설명하듯. 저자는 투사와 내사만으로 현실을 환원해, 마치 현실을 구성하는 진실이나 사실이 그 상상(투사와 내사)의 부대물이라는 양의 실험적 전개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와 같은 투사나 내사는 기본적으로 현실 인식을 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이므로, 그처럼 투사나 내사는 현실 인식 자체의 여집합이므로, 현실 인식까지도 투사나 내사의 일종이라는 주장은 '개념'적으로는 그 처음부터 모순에 불과하다. 허나 투사나 내사라는 기제가 벌어지는 관념적 사건도 미숙한 우리의 관념이 작동하는 원시적 양상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양상으로서의 '현실', 따라서 그게 현실 인식은 아니지만 그리 인식되어야 할 현실의 일종이기는 할 터다. ('현실 인식'은 '내사나 투사기제'와 구분되어야겠지만, '현실 인식'과 '내사', '투사' 모두 '현실' 자체에 속해 있는 건 자명할 모양이니) 그러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이가 현실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렇게 그가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는 하다고 해서 현실이 현실 도피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현실은 분명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내사하고 투사하는 기제만으로 현실을 설명하려 애쓰는 혹자를 포함해서 작동 중이지만, 이 작동은 당 기제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까지도 포함한다.

이를테면 만화영화를 흉내 내는 소년이 저기 저 ‘주인공’을 ‘내사’하고 있다고 치자. 그러나 이처럼 그가 저기 저 '주인공을 내사하고 있다'는 '개념'적 설명 자체는 무얼 내사하거나 투사하고 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수학의 논리 전개 자체는 투사나 내사의 결과물일 수 없다. 소위 방어기제를 거쳐 발달하기를 거부하고 거기 머무른 상태에서 모든 걸 투사나 내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가 그 이후의 발달을 모르거나 거부한 결과로 밖에는 볼 수 없으리라.

물론 내사나 투사라는 환각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식하고자 시도하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노력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심지어 궁극적으로 모든 사실을 그렇게 다루는 게 가능할지 아닐지 알 수도 없다. 팔은 안으로 굽고, 우리 자신이 처한 환경에 기회주의적으로 현실 인식을 거부하는 스스로(내사나 투사로 되돌아간 자신)를 때때로 발견할지도 모른다. (절대적 현실을 인식하고자 하는 바로 이 노력이 투사나 내사 다음 단계를 밟는 증거로서 '죄책감'을 산출하고 다루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령 ‘중력’은 있다. 중력은 어떤 조건 지어진 공간 내에서 작동하는 ‘사실’이다. 우리가 제아무리 중력이 없다고 투사하거나 내사하더라도, 중력이 없다는 이 자기최면(투사나 내사)은 ‘현실’이 아니고, ‘자연’ 상태에 대한 설명도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인위적인 문명’의 [발달] 속에서 '개념'적으로 배워 오지 않았겠나. 우리는 ‘가설’이라는 허구를 통해서라도 보다 정확한 원리를 개념화할 수 있다. 가령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이라는 건, 가설적으로만 논증된다. 여기에 무슨 예외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모든 경우의 수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한 원리가 '유효한' 허구를 가지고 논증되어야 차후 그 원리를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개념(이념)적 원리 자체는 ‘투사’나 ‘내사’의 결과가 될 수 없다.

그처럼 우리가 원하여 투사한 이미지 위주로만 현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관성 위에 있다면, 그리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주길 원한다면, 도리어 도무지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세계가 ‘투사’나 ‘내사’의 결과가 아니란 걸 반증한다. 세계가 모두를 등장인물이자 ‘주인공’ 삼은 시뮬레이션이란 주장은, 그러니까 세계가 우리 ‘투사’의 결과물이자 우리 자신이 우리 ‘내사’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삶의 ‘고통’이 존재함으로 곧장 부정된다. 무의식이 아닌, 최소한 ‘의식’은 스스로 ‘고통’을 원하진 않을 테니. 그러나, 거기서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모르는 무의식이 고통을 원했을 뿐이라고. 이는, 마치 어떤 설교자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계획을 신이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신을 논증했다고 '주장'하는 모양새와 유사하다.

저자는 인물들의 무의식이 시뮬레이션 내 그들의 성격이나 환경을 빚어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프로그램이 무의식 각각을 반영하며 서로의 충돌을 조정한 결과가 총체적인 세계라고. 각자 원하는 현실이 다르므로, 이를 타협해 조정한 결과가 소위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가 투사나 내사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렇게 이미지적 관념으로만 환원된다면 세계에는 (공통의/절대적) ‘현실’이라는 게 없고 관념(이미지)들끼리의 상호 투쟁(조정)만 있다고 가정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자기 버전의 현실을 얼마나 더 바라느냐로 현실이 변한다면, “투사나 내사의 정신력”이 서로 타협(갈등)한다고 가정해야 할 텐데. 이미 타인의 ‘정신’이 고려된 순간 우리 정신은 현실에 온전히 반영되지는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실상 타인의 정신은 자기 투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앞서 부정한 하나의 (공통의/절대적) ‘현실’이 되어버리는 셈이니까. 따라서 이 타협의 장에서 현실원칙은 ‘자의(환각)적’ 권력투쟁과 동일시된다. 그러한 투쟁은 의식끼리가 아니라 무의식끼리 일어나는 까닭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누군가 자기 '앎'을 설명하는 모순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거나 ‘타인’이 등장하는 순간 세계는 누구의 ‘온전한’ 투사나 내사도 아닐 수밖에 없다. 투사나 내사라는 기제가, 타인을 인정하기 이전 유아의 방어기제라는 점에서, 투사나 내사로 모든 이들의 세계관을 환원하고자 하는 순간 그는 이미 ‘타인’을 인정하기 전에 멈춰 있다고도 볼 수 있겠고. 거기선 타인조차 자기 투사의 결과로써만 간주하는 ‘유일 자아’만 비대하게 현현하는 셈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우리는 타인을 인정하기 힘겹다. 여기서 타인은 ‘투사’나 ‘내사’를 공유하는 동일자 집단의 다른 개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오늘에 이르러 SNS를 통해 함께 투사하거나 내사할 수 있는 동일자를 찾기 쉬워졌지만서도, 여기서의 타인은 저와 달리 투사나 내사의 종류가 완전히 다르거나 해당 기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까지 포함하여 이른바 유아들의 권력투쟁을 일방적으로 촉발시키는 다른 세계관의 ‘타자’를 말함이다.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투사나 내사라는 '이미지' 기제를 사용하거나, 당 방어기제의 다음 단계로서 누가 투사하거나 내사하든 변치 않는 사실(이를테면 1+1=2 등)을 '우선' 개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추정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등의 ‘타인’이다.

요컨대 ‘사실(현실)’이라는 게 그렇다. 너무 미워 비하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대급부의 부분, 혹은 너무 좋아 과대평가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대급부의 부분만이 '우선' 신빙성 있는 사실일 터다. 우리네 자의적 확증 편향 속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나, 도피하고 부정하고자 애쓰는 와중에라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이 ‘투사’나 ‘내사’로 오염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미약하게나마 알려주는 단서인 까닭도 거기 있다.

우리는 이 '불편한 자료(타자-바깥)'들의 추상적인 패턴을 찾아내 '개념'을 다듬을 수 있다. 점차 자명하게 가공(내사나 투사가 아니라 이해와 비판으로)한 개념들로 현실과 상호작용하며, 개념과 동시에 현실 또한 가공해 나아갈 수 있다. 투사와 내사라는 이미지적 상상을 극복하는 과정에 '이념'이 포함되고, 언젠가 이 이념 또한 '현실'로 극복되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이 극복의 노력은 죄책감의 발달로 증언된다. 우리는 느낌(상상-투사나 내사)에서 개념(원리)으로, 무수한 이념의 원리를 거쳐 극복하며 현실(타자-소통)로 영영 나아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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