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 Oct 15. 2023

전시 작품 '공존' 리뷰

전시 '심연에 대하여' 리뷰

_

전시: 심연에 대하여 - 권리아 개인전
작가: 권리아
작품: 공존
_

#심연에대하여리뷰
#공존


_

우리 행동은 종종 우리 의도(욕망) 아래 수행된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적도 있다. 혹은 대다수 그렇지 않다. 가령 우리는 물리적 한계 위에서만 행동할 수 있고 사회적 압력하에 행동을 강제당할 수도 있다. 관습에 맞는 옷이나 예절 등에서 우리는 행동반경의 교정을 경험한다. 그처럼 하기 싫은 걸 수행하거나 하고자 하던 걸 포기하는 등으로, 우리 행동은 우리 자신의 의도(욕망)와 괴리되곤 한다. 그와 같은 삶의 시공간적 한계 및 집단으로 이루어진 타인’들’의 사회적 압력을 제하고서라도, 우리는 우리 미래로부터 또한 압력을 받는다. ‘현재’의 욕망에 의한 행동이 ‘미래’를 포함한 갖은 경우의 수에 관한 ‘염려’로 제약을 받는 양으로.

예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도를 펼치기 전 마주한 상대의 감정을 얼마만치 고려한다. 꼭 ‘공적’인 업무상의 상황이 아닌 ‘사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책임을 다하도록 종용받는다. 가령 부모로서 (소위) ‘사랑’의 책임은 여타의 직무 책임만큼 혹은 그 이상의 어떤 이념적 압력을 에둘러 종용당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또 우리가 주관 세계에서 다른 관념 세계를 추론할 수 있을지언정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어쨌거나 모든 타인은 서로에게 이미 미증유의 과녁인 셈이다. 우리가 무얼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미래’를 확신할 수 없으며, ‘타인’의 생각을 확신할 수 없고, 우리 기억의 정확성 또한 결코 못박아 확신할 수 없다(그저 논증할 수만 있다). 심지어 같은 사실을 다른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서로 간의 관계 지형도를 생각해 볼 때, 그처럼 시간상으로 지나온 ‘정황’들이 현재에서 돌아볼 적의 몇몇 증거품 외에는 그저 관념으로만 남아있을 때, 저기 저 ‘과거의 정황들’ 자체를 불확실한 ‘미지수’로 간주할 수밖에 없지 않던가.

우리가 살피는 우리 자신의 의도(욕망)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각자 자기 욕망을 안다고 그리 섣불리 확신할 수 있던가? 그 욕망이 피어나고 사그라지는 영토가 우리 자신이라고 해서 그 욕망을 샅샅이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관되거나 모순된 취향을 현실에 관철할 수 있을는지 여부 또한 보다 미리 알 수 있게 될 터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것을 성취한 자리에서 우리는 종종 욕망하고 추구하던 과정으로서의 만족감과 성취의 순간 단박에 자리하는 만족감이라는 두 만족감을, 설령 그 둘이 합치되는 순간이 그토록 자주 있을지라도, 어쨌거나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곤 하지 않나. 그처럼 우리 욕망은 성취를 기준으로 그 사전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적으로도 분기될 수 있다.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감상과 이룰 수 있을 꿈을 전개하는 감정 또한 이미 어느 정도 다르다는 걸 알지 않던가. 예컨대 이룰 수 없는 까닭에 꾸는 꿈을 이제 현실에서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언젠가 종용당했을 적에, 그때부터 그 꿈이 갑자기 자기 욕망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사례가 없지 않을 만치 우리는 모순적인 동시에, 그처럼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조차 스스로 무지하지 않던가. 우리 행동의 동력인 ‘욕망’에 대해서마저 그러할진대, 욕망 바깥의 스스로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스스로 얼만치나 알 수 있을는지. 또한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그 앎이 우리에게 속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는 것과 겪는 것의 차이 위에서 살 수밖에 없다. 가령 그 앎이 우리 욕망을 제아무리 지적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욕망의 실패나 성취를 겪은 이후에야 저마다의 욕망이 도대체 무엇이었음을 어느 정도라도 겨우 추정할 수 있지 않았나 말이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인 자체나 타인의 관념 세계, 또 ‘미래’나 온갖 경우의 수만치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타자’가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 욕망에 우선 충실하고자 하는 일조차 그리 ‘자연스럽게’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일 리 없다. 우리는 우리 욕망을 그저 발산하고자 하면서마저 이를 충실히 욕망하고자 한다면 어쨌거나 치열해야 할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우선 공존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라는 ‘타자’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미증유의 신비로운 ‘타자’로 제시하고자 하는 관계 내 사상누각의 처세술에서조차, 실은 그 누구보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만) 특히 그는 미증유의 신비로운 ‘타자’인 셈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소위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 우선 스스로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고 보면, 실로 다른 관계의 ‘공존’의 선결 요건 또한 ‘무지’를 인정하는 작업이 아니겠나. 그런데 이 ‘무지’는 미증유의 대상 자체에 대한 무지일 수는 없으리라. 우리가 우리 자신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고 인정하건 하지 않건 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 자체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한에서 그 관계의 양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그 과정적 해결을 전개할 수나마 있을 모양이니.

우리가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게 남에게 받아들여질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를 결과로서 산출하는 ‘관계 양상’의 구조와 상호작용이듯.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이전의, 그러한 자신과 스스로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나. 따라서 이는,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의 문제인 셈이다. 이른바 ‘관계’는 공존의 한 방식이며, 그런 의미에서 관계의 단절조차 관계의 한 양상인 동시에 공존의 한 양상이 아니던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타자’를 고려 대상에 넣어야 하는 건, 그것이 윤리적인 까닭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한 우리에게 ‘타자’이듯 ‘타자’ 아닌 대상이 무엇도 없는 까닭이며, 그런 의미에서 ‘타자’와 맺는 관계 아닌 ‘관계’가 영영 없는 까닭이고, 그것이 공적이건 사적이건 모든 ‘타자’에 대한 관계는 어느 정도의 '무거운' ‘책임’을 수반하는 까닭이리라.
_

매거진의 이전글 전시 작품 '애도'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