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종이를 물어뜯는 강아지에게 간식을 숨겨 구겨놓은 종이 뭉텅이들을 주면, 그는 각각의 뭉텅이 내부에 싸인 간식을 찾고자 종이를 다시 물어 뜯곤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부터 간식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 없이는 종이를 물어뜯는 행위를 그만두지 않을까?
문제집 한 페이지를 풀 때마다 사탕을 받는 소년은, 언젠가부터 사탕 없이는 문제를 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수의 부모는 이미 이와 유사한 1차원적 보상을 무수하게 실행하는 중이다. ‘칭찬’과 ‘비난’은 매우 단기적인 보상 체계일 모양이니까. 비난 어린 잔소리가 듣기 싫어 공부를 열심히 하던 소년은, 이제 비난 없이는 공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고로, 어차피 단기적인 보상을 제공할 거라면 ‘칭찬’과 ‘비난’보다야 소년이 원하는 보상(장난감이나 과자)을 제공하는 게 좋지 않겠나?
비난만 퍼 나르다가 좋은 성적일 경우에만 이를 철회하는 습관, 마찬가지로 성적표만으로 칭찬하는 습관은 아이의 입장에서 ‘단기적인 보상 체계’지만, 이를 제공하는 공급자(부모) 입장에서는 그저 감정 가공의 실패이자 가공 이전 감정의 유아적 발산에 불과하다. 상대(자녀)의 입장을 시뮬레이션(추론)하는 건 꽤나 힘겨운 추론 작업일 양이고, 이 추론에는 다량의 시행착오가 필수라 무수한 오류로서, 아이에 비해 자기 자신이 뭐든지 아는 어른이라는 자아상의 손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허나 자녀 또한 한 명의 개인인 만큼, 서로의 주관 세계에 동등한 타인으로서 참여하는 일 없이 멀쩡한 대화는 영영 힘들 터다. 그저 아이가 경제/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기간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그러니까 용돈이나 처벌을 통해 사회적 울타리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발산된 부모의 감정을 강제적으로 아이에게 관철하는 정도만 가능할 뿐.
예컨대 공부를 시키는 데 과잉 몰두하는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채 사회에 나왔던 자기 자신을 아이에게 투사projection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아이가 미래에 느낄 감정’이라는 명목으로 대비하라고 주장하는 건 실상 자기 자신이 언젠가 느꼈던 감정(이를테면 열등감)일 테니. 이는, 사회에서 부딪쳐 손상된 자기애(나르시시즘)를 자녀에게 그 손상의 보상으로 투사해 과잉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기제와도 유사하다. 아이 자신의 잘못으로 처벌을 받는 상황이 제삼자에게서 벌어지면, 그(부모)는 ‘아이에 대한 처벌’을 ‘아이의 자기애의 손상’으로 번역한 다음 곧장 이를 동일시(내사/역투사)하여 마치 ‘부모 자신의 자기애의 손상’처럼 다룬다. 물론, 이 무수한 동작의 배후에는 ‘동일시(투사-내사)’ 기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공감이라는 기호의 커다란 테두리의 사용은 종종 ‘추론(시뮬레이션)’과 ‘동일시(투사-내사)’를 혼용해서 지칭하곤 한다. 그렇게 보면 과장된 이입(동일시)은 종종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의 옳음이 스스로 과잉으로 관철되어 있어 타인뿐 아니라 자기 감정이나 관념을 분석하는 작업조차 철저하게 방해하곤 한다. 그렇게 상대의 입장을 시뮬레이션(추론)하는 일이 소위 ‘공감’이라는 선전 문구로 호명된다고 해서, 그렇게 소위 미디어 속 ‘공감’이라는 기호에 섞여든 강제적인 인상처럼, 공감하고자 하는 이가 그 추론(공감)의 대상인 타인의 주관 세계가 현재 겪고 있는 감정을 완전히 똑같이 모사(동일시)해 겪고자 애쓸 필요는 분명히 없으리라.
왜냐하면, 쉬이 동일시(투사-내사)하는 방어(보상) 기제는 오히려 정확성만 떨어뜨려 ‘강력하고’ ‘감동적인’ 오인지만 불러 일으키는 까닭이다. 누구의 관념 세계에 대해서도 ‘추론’ 이상은 애초에 불가능할 테니. 그 이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종종 과잉된 자기감정에 비롯된 ‘메시아’적 대사들이 분출된 양상에 불과할 터다. 가령 우리가 간혹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은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듯한 층위의 ‘함께한다는 감정’을 제각각 외따로 느끼고 있는데 불과할 양이니. 인간뿐 아니라 그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과 완전히 같은 감정, 같은 상황에 처할 수가 없을 모양이므로, ‘정확한’ 공감(역지사지)은 고도의 ‘인지(추론) 능력’ 중 하나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