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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쳇바퀴

시즌 2 SIGN

by 이채

부모에 대한 소박하고 흔한 (그러나 종종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정해 보자.

그는 현재 31세다. 그의 트라우마는 최근에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트라우마는 작년까지 실상 트라우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트라우마는 4세 내지 5세 시절에 대한 것인데, 30세가 될 때까지 당 사건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31세가 되고, 모종의 (관념적) 사건으로 인해서인지, 그 사건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과거 그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트라우마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그의 과거를 구성하는 건 그 자신의 현재 절대적 한계(관념적 필연성-포석)이기도 하다.

처음에 그는 이 ‘트라우마’를 마주한 충격으로 다른 상상을 시도한다. 공상의 세계에서 그는 복수를 할 수도 있고, 완전히 이를 ‘망각’하는 양 신경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을 소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그의 ‘트라우마’는 증식한다. 현실 세계에서 이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그는 곧장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부모를 연상하게 하는 직장 상사가 그를 괴롭힐 때마다 사옥 외곽에 있는 창문을 곁눈으로 응시하며 저 바깥의 누군가는 무얼 하고 살까? 만약 내가 여기 없고 ~했다면? 하고 가설을 재차 설정하기도 한다. 또 언젠가부터 트라우마 속 ‘부모’를 연상하게 하는 건 이제 부모와 유사한 ‘직장 상사’ 뿐만 아니라 마주하기 싫은 모든 불쾌한 현실 전부가 되어, 현실에서 사소한 저항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늘 상상의 나래를 편다.

쳇바퀴가 구른다. 현실에서 일종의 ‘저항’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상상 속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현실의 ‘저항’ 자체는 방치된다. 어느 날 그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의 부패한 잡동사니 속에서 방치된 채 깨어난다.

그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대로 살면 안 되는가?

어쨌거나 그가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여기기 시작한 동기는 ‘책임’을 종용하는 사회의 충고도 아니고, 그러니까 민폐를 끼쳤던 직장 동료에 대한 미안함도 아니고, 카드 빚을 독촉하던 어느 카드사 직원의 예의 바른 설명(독촉)도 아니다. 그는 그저 잡동사니가 불편해서 잠깐 깨어난 셈이다.

그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대로 살면 안 되는가?

그는 이 삶의 잡동사니만 잠깐 정리해 두고 다시 상상 속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잡동사니 전부를 정리하려면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그는 삶을 검토하고자 하지만, ‘자기 자신이 자꾸 상상하게 되는’ 메커니즘 자체에 대해서는 검토하고 싶지 않다. 그건 예의 메커니즘의 결과인 상상 자체가 삶 이상의 것이라 믿는 까닭인지도 모른다(차라리 예의 상상을 찬양하는 목록만 찾아서 ‘검토?’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도피처는 남겨 두어야 하지 않겠나. 그는 이 잡동사니만 정리되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저항’을 방치하고 상상 속으로 피신하게 했던 저 최초의 방어기제에 대한 검토까지는 내려가지 않고, 우선 눈에 보이는 저 ‘잡동사니(결과)’들을 정리하자고 마음먹는다.

그가 저 ‘잡동사니’들을 일단 정리하면서도, 이 잡동사니(결과)를 계속 생산하며 방치되어 여태 작동하던 ‘원인’ 자체는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이제 ‘망각(해리)’이다.

그는 잊는다.

그는 말초적 해결에 몰두한다. 그는 종종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다. 그는 표면적인 정리에 집중하여, 그 정리의 원인이 되었던 고통스런 트라우마를 잊고자 한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기억하게 만드는 직장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그는 이제 상상 속으로 도피하지는 않는다. 이젠 그 자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어떤 망각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그는 잊는다.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를 되도록 빨리 해결하고 곧장 상상 속으로 돌아갈 예정이므로. 그렇게 잡동사니(결과)는 점차 해결되는 양 보인다. 점차로 그는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고 느낀다. 이제 조금만 안정되면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그는 상상 속으로 돌아간다.

다시, 그는 잡동사니 속에서 깨어난다. 그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대로 살면 안 되는가?

다시, 그는 잊는다.

그는 돌아가고, 깨어나고, 잊고, 다시 돌아간다.

그는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그렇게 다시 또 돌아간 어느 날, 그가 그렇게 겨우 돌아간 자리에 그가 처음 도피하려던 트라우마가 ‘감히’ 반복되기 시작한다. 악몽이 정신적 해결을 반복적으로 요청(원망)한다. 그는 이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다시.

그는 돌아가고, 돌아간다.

수 없이 스스로에게 시달리던 그는, 언젠가 어쩔 수 없이 저 악몽의 원인을 비로소 개념으로 정의(정리)하고자 시도한다(혹은 무한한 원망과, 아늑했던 과거 상상에의 과대평가로 상태를 이어 연명(방치)할 수도 있겠다).

처음에 그는 오늘의 무엇이 과거를 그렇게 해석하게 하는지 살핀다. 증상을 단서로, 자기 정신의 모양을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검토하고자 한다. 그래서 상상은 원인을 어떻게 감추곤 했는지. 그래서 거듭된 해리(망각) 상태가 진정 잊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이제 와서 반복되는 악몽이 그에게 호소하는 해결이 무슨 문제를 문제로서 바라보고 있는지. 그는 자신의 ‘정신’이 현실의 어떤 ‘저항’을 ‘저항’이라고 정의하는지 정의하고자 살핀다. 그렇게 분석하는 ‘정신’ 또한 분석되는 ‘정신’과 같은 ‘정신’이므로 한계가 있다고 느낄 적도 있다. 그러나 ‘정신’이라는 속성상 혹자의 도움을 통하더라도 끝끝내 스스로 직면해야 할 ‘정신’적 지식은 자기 자신만이 가장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는 주관 세계이므로, 그는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해석하고, 그 해석을 재차 다시 해석하는 주석들을 연이어 달기 시작한다. 그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자칫 돌아갈까 봐. 그럼에도 종종.

그는 돌아가고, 돌아간다.

어느 날 그는 기를 쓰고 내려오고자 하던 이 쳇바퀴에서 이제 내려오기보다 그저 새로운 쳇바퀴를, 덜 고통스러운 쳇바퀴를, 기성의 반복(쳇바퀴)을 자료 삼은 차라리 새로운 욕망의 쳇바퀴를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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