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저 사물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관 세계에서조차 기호를 도용하거나 생산하여 사용하는 방식으로 회상을 이어가거나 지성을 전개하거나 한다. 그렇게 이미 현실은 관념 세계로 가는 단서투성이며, 동시에 늘상 이 관념 세계를 매개하고 있고, 각자의 저 관념 세계가 아무리 상대적인 세계라 주장할지라도 그 또한 이미 각각의 절대적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전거를 상상하지 말라는 목소리(명령)에 대한 대응으로서 ‘자전거를 상상한다’는 명제는 이미 ‘절대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테니까.
그가 무엇을 자전거로 ‘정의’하든, 그가 떠올리는 건 그 자신이 늘 자전거라는 기호로 지시하는 대상일 테니. 어쩌면 그가 생각한 건 사회적 약속 내부에 있는 자전거가 아닐 수도 있겠다. 해당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으로 판별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순 있겠으나, 어쨌거나 어떤 타자도 타인의 관념 세계에 대한 저 판별을 완전히 확신할 수야 없으리라(못 박아 확신하고자 하는 불합리한 억지 태도만 남겨질 터다). 가령, 그가 ‘진정한’ 자전거를 ‘진정’ 떠올렸는지, 아닌지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이나 ‘거짓’의 개념은 ‘과학적’이지 않더라도 ‘절대적’이리라. 말하자면 관념의 자명성을 고려하지 않고 가설(상상)이 추론이 될 수야 없겠으나, 어쩌면 거꾸로 상상 그 자체 또한 얼마나 구체적으로, 또 어떤 방어기제로 펼쳐졌는지는 최소의 자명성을 기준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나? 실상 추론하는 데 실패하여 헛다리를 짚더라도, 추론의 목적 자체는 (확신의 동어반복이 아닌) ‘정확성(불안)’을 재차 검토하는 데 있으므로. 기실 해당 논의가 너무 추상적이 되어, ‘정확성’ 자체가 허상이라는 목소리 속에도 정확성에 대한 동일 주장이 내재되어 있을 터다. ‘정확성’이 [정확하게는] 허상이라는 주장은, 그게 허상임을 논증하는 바로 그 ‘정확성’을 토대(전제)로 한 주장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저기 저 관념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우리는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생산된 기호를 연역하여 관념에 가져다 붙이기도 한다. 요컨대 사물을 지칭하는 기호조차 관념의 일종이고, 지칭된 기호를 사용하여 수행되는 더욱 추상적인 의사소통 또한 관념을 토대로 이어지고, 그렇게 성립된 대화의 결과물 혹은 사고의 결과물 또한 하나의 관념이므로. 말하자면 대화(모든 의사소통)의 전제로서, 대화하는 서로가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사물들 배후에 ‘절대적 사물’이 분명 있을 거란 합의의 다시 배후에는, 그렇게 다시, 무수한 상대적 관념의 바다 속에서도 ‘절대적 관념’은 분명 배후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동의가 내재되는 중 아니던가(이 동의 없이 개인 간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테니). 따라서 각각의 명징한 자명성(필연성)을 지닌 관념의 최소 단위(정동)들이 어떻게 하나의 주관적 세계관을 구성하는지 매번 살피는 건, 모조리 저기 저 ‘절대성(필연성)’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말하자면 모든 다양성의 전제가 되는 개별 일관성이 있고, 응용의 전제가 되는 상황마다의 정석이 있듯. 연역의 최초에 자리한, 이를테면 ‘관념적 필연성(정동)’이 현재 어떻게 연역되어 있는지를 토대로 다시 되감아, 설령 무수히 실패할지언정, 저기 저 최초의 정동을 추론하는 시도를 반복할 수는 있을 모양이니. 물론 거기 남는 건 추론된 정동의 확신에 찬 결론 따위가 아니라, 때마다 정동(관념적 필연성, 관념의 최소 단위-원리/직관)을 다시 추론할 수 있을 역량이겠고.
따라서 우리는 관념의 최초 단위(과거-필연성)를 추론(상상)할 수 있듯, 마찬가지로 관념의 효과 단위(미래-가능성)를 추론(상상)할 수도 있을 모양인데. 어떤 감동을 고안하여 설계하는 등, 추론된 해당 효과(정동)를 산출하는 무대장치(상상된 산물)를 재차 마련할 수도 있으리라. 말하자면, 상상이 어떤 효과(유효성의 종류)를 가지는지에 따라 이는 계획으로 불릴 수도, 문학(작품)으로 불릴 수도, 또 위로로 간주될 수도 있겠으므로.
그리 관념의 효과를 상상(추론)하는 건, 관념이 (아주 미묘하게라도) 복수로 각기 해석(연결) 가능하다는 걸, 그러니까 관념’들’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다(물론 그러한 관념들의 의사소통 자체는, 설령 그게 가짜라도 ‘절대적 대상’에 대한 임의적 합의가 있는 까닭에 가능할 양이고―‘사자’를 ‘사자’라고 부르기로 합의 하기 위해서는 ‘사자’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절대적 의미에서 교집합의 합의가 ‘미리’ 필요하다). 물론 효과의 측면에서 이 관념을 살피자면, 관념 간 의사소통의 전제가 되는 ‘절대적 현실’보다야 개별 관념들이 동일하게 전개되는 사고 과정의 동일성, 그러니까 관념의 주인이 누구든지 관념 자체가 동일하고 자명하게 전개되는 절대적 무늬의 확인이 우선 필요하다. 이를테면 1+1은 누구의 관념을 통해서든 2가 될 수밖에 없듯. 우리는 논증의 측면에서와 같이, 정동의 측면에서 이를 추론해야, 끝끝내 도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컨대 ‘감동’이나 ‘분노’의 원리를 탐구해 나갈 순 있으리라.
그러므로 관념 자체의 최초 단위에 대한 추론뿐만 아니라, 관념의 효과 단위에 대한 추론(상상)도 기본적으로 ‘관념에 대한 관념’일 터다. 따라서 관념의 효과를 추정하는 행위는, (동일시된) 타인(의 관념)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같은 관념(동일시된 타인)을 가정하여 의사소통의 효과를 우선 추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기호’라는 개념과 만날 수밖에 없다. 그처럼 ‘동일시된 타인’과 ‘실제 타인(타자)’ 간의 거리는 미묘하게 어긋난 기호의 교정 작용을 그 효과로 삼는데, 이 거리의 긍정은 자신과 타인의 ‘차이’의 긍정(분석)인 동시에 타인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 자체(기호의 전개)이자 그 결과로서 작용할 테니까. 따라서 ‘관념의 효과에 대한 관념’, 그러니까 ‘관념에 대한 관념’, 고로 ‘상상’은 다분히 사회적이다.
고로 우리 상상은 사물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만 작동(이입)할 양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일견 비극적이거나 영웅적인) 역할에 대한 1차원적 공상이나, 그렇게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반응, 고로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 양상을 ‘상상’하는 건 이미 사물 자체에 대한 상상(추론)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어쩌면 사물 자체에 대한 해석을 상상해 낼 수는 있겠다. 그건 마치 사물의 작동을 상상하여, 상상된 작동 양상을 구축하고, 구축된 양상의 작동이 마침내 ‘누군가(사회―타인)’에 의해 ‘사용’되는 걸 ‘발명’이라 간주하는 양상과 유사하다. 그처럼 일종의 ‘해석’은, ‘사용’할 만한 ‘관점’을 ‘발명’하는 행위와 유사하지 않은가. 고로, 상상은 물리적인 관점을 포함한 대다수 ‘사회’적인 ‘사용’을 그 질료로 삼는다고 할만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상상’은 타자(이질적인 대상) 아닌 ‘타인(투사되고 동일시된 관객)’을 이미 다분히 의식한 ‘행위’일 터다. 고로, 관념의 효과에 대한 추론(상상)은 이미 그 뿌리부터 사회적이며, 그러므로 상상이 추론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우선’ 관념의 기원(필연성)에 대한 추론으로서가 아니라 관념의 ‘사용’에 관한 추론(상상)으로서부터리라(그렇게 언젠가 상상은, 비로소 추론이 되어서야 ‘타인’ 아닌 (가령, 타인뿐 아니라 사물 자체를 포함한)‘타자’에 대한 ‘관념(기호)의 전개’를 덧입을 수 있을 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