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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Oct 11. 2023

전시 작품 '껍데기' 리뷰

전시 '심연에 대하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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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심연에 대하여 - 권리아 개인전

작가: 권리아

작품: 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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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대하여리뷰

#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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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권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이를테면, 자기 자신의 본래적 범위는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혹은 우리가 한 사물을 지칭할 때, 지칭하는 기호에 대응하는 대상 너머에서 과연 소위 ‘본질’을 가상적인 방식 외에 어떻게 구경이나마 할 수 있을는지. 저만치 울퉁불퉁한 인식과 감상의 세계에서, 과연 그 누가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분할 수 있고 또 단상 위에 서서 알맹이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그토록 힘주어 역설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어떤 목적이 있는 ‘행동’들 중 목적에 알맞은 행동만을 ‘알맹이’라고 한다면, 목적에 알맞지 않은 나머지 ‘행동’들은 그렇게 ‘껍데기’에 그치게 될 터다. 여기서 ‘행동’의 본래성을 지명하는 권력은 저기 저 ‘목적’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여기 이 행동은 그 자신 자체만으로 자기 본질을 정의내릴 수가 없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행동의 목적 또한 종종 우리 욕망이지 않은가. 가장 나다운 나는 나 자신의 욕망을 따를 적을 지적하고 있지 않나. 그처럼 언젠가 혹자에게서 모방되어 답습되어 온 ‘욕망’이나 사회가 상황마다 요구하는 과업 등, 이 ‘목적’들이야말로 ‘행동’이 작용하는 특정한 관계의 양상이고 보면, 본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무수한 관계에 의존하고 있을 모양이다.


그러므로 본질과 비본질을 나누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벌써 ‘본질’의 독립(주체)성을 부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것이 본질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과연 이것이 ‘무엇에 대하여’ 본질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리라.


예컨대 ‘무엇’에 관해 선언된 이 본질은 이 선언보다 우선 정의된 저 ‘무엇’과의 ‘관계’들에 의존하고 있고, 무수히 변모하는 예의 ‘관계’ 양상이 저기 저 불변으로 가정된 본질에 끝끝내 포함될 수 없다면, 끝내 본질의 더욱 뿌리에는 비본질적인 관계들의 양상이 펼쳐져 있다고밖에 볼 수 없으리라.


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여타의 관계를 배제하고 규명할 수 없다. 과연 우리가 우리 바깥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행사 당하고 있는지를 볼라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총체적인 외부 구조를 임의로 설정해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만 발견할 뿐이니.


허나 저 바깥은 그리 보고자 하는 만치 매끈할 수 없지 않던가.


어떤 역설, 변치 않는 것은 변한다는 바로 그 사실 뿐이라는 낡고 오래된 역설은 껍데기와 알맹이를 뒤집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극복되는 건 본질과 비본질의 두 고정된 자리 정도가 아니라, 그처럼 섣부르게 우선 선언되어 있던 둘 사이의 매끈한 경계일 양이다. 과연 무엇이 알맹이인가? 그처럼 무엇이 알맹이고 또 껍데기인지 매번 다시 고민하기 싫어, 시초에 지명했던 바로 그 알맹이만 바라보고 사는 전통적인 관성 아래에 우리는 저토록 오래 서성이곤 하지 않았던가.


고로, 다시 매번 고민되어야 하는 건 실시간의 ‘관계’ 양상이라는 뿌리 깊고 울퉁불퉁한 표면이다. 그와 같이 본성이 매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본성을 둘러싼 관계라는 포장 바깥의 껍데기 위에서 이 껍데기를 다시 참조할 수 있는 저 ‘심연’은, 준비가 완전하기 전에 매번 다시 움직여야 하는 저 ‘변화’ 자체의 운동성이리라.


그리하여 전통적인 알맹이가 지칭하는 게 ‘그가 과연 누구인가’에 그친다면, 그 알맹이 아래 심연에는 ‘그가 과연 무엇에 대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가’라는 울퉁불퉁한 껍데기가 끊임없는 고민의 역량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고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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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아트

#사이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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