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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Nov 18. 2023

24 훼손에 대한 감각

시즌 3 FICTION

2023년 7월 즈음 만원 버스를 타면 버스 벽면에 종종 보이는 광고지가 있다. ‘마스크 미착용자 탑승 금지’라고 적힌 이 광고지는, 여타 다른 버스들에도 동일 맥락의 다른 문장으로 여즉 광고 중이다. 그러나 이를 시선 안에 담고 있는 탑승자들 다수가 현재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다. 코로나의 여파가 이제 잠잠해졌는지 혹 아직 위험한지, 또는 다시 위험할 수도 있는지와 관련 없이 어쨌거나 탑승자들이 마스크를 쓸지 쓰지 않을지 등의 자기 상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예의 광고지의 명령은 그 힘을 다한 것 같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도 탑승한 승객들을 단서로 살펴 생각하자면, 마스크를 쓰고 탑승한 승객들조차 해당 광고지의 명령과 관련 없이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양 보이니까.

광고지는 아직 수거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 속에서는, 관념상으로라도 해당 명령은 수거되었다. 이를테면 전염의 원흉에 대한 추적 명령도, 예전만큼 많은 원망을 그 동력으로 삼지 않는 양 보인다. 말하자면 어떤 무관심이 광고지의 효력을 부정하고 있다. 혹은 무관심에 대한 합의가, 그러므로 어느 정도 이 화제를 무관심의 영역에 두자는, 혹은 둬도 되겠다는 ‘합의(관심)’가 저 광고지를 그저 종이 쪼가리로 여기게끔 재차 명령하고 있다. 저 합의는 무관심하자는 합의로서, 다수가 가진 관심의 결과물이리라. 요컨대 저 명령(합의)은 (소위 코로나에 대해, 혹은 코로나의 확산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자고 합의했던 이전 명령을 참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광고지에 무관심하자거나 무관심해도 괜찮다는 (허용의) 명령은 사회적 맥락을, 그러니까 ‘역사’를 계속해서 참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광고지는 흘러간 역사의 찌꺼기이자 폐기된 증거로서 여즉 버스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승객들은 스스로 붙잡힌 시야에서 (가령 뉴스의) 역사를 기준으로 판단하여 해당 광고지를 무시하는 중이다. 이토록 체계적인 무시는 어떤 확신에 기인하고, 이 확신은 과일이 땅에 떨어지는 양의 물리적 자연법칙에 관한 확신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이자, 그 합의의 역사를 실시간으로 따라잡고 있다는 확신인 동시에, 같은 역사가 다른 동료 시민(예를 들어 버스 기사)들에게도 동일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일 터다.

가령, 이런 역사와 동떨어진 누군가는 마스크를 쓰지 말라는 공공 광고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승객들을 보면서, 아울러 빨간불에는 명목상으로라도 건너지 않고 녹색불에만 건너는 횡단보도의 권리상의 질서를 보면서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대체 왜 사회의 어떤 명령은 항구적인 양 보이고 어떤 명령은 조건부로 보이는가 하고. 어쩌면 항구적이지 않더라도 항구적으로 간주할 만큼 우리 인생이 사회에 비해 짧은 까닭에, 혹자는 그저 항구적인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규칙 속에서 변화 없는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규칙이 그런 의미에서 안전하다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변화가 충분히 더디다는 뜻이기도 할 터다. 어쩌면 그와 같이, ‘사회 변화의 속도가 사회 구성원들이 적응할 여유 시간을 어떻게 확보해 주고 있느냐’라는 화두를 여기서 끌어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회 변화의 속도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이미 사회 변화 자체가 긍정되고 있다는 말일 모양이다. 이 변화는 지속적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는 변화의 매 순간 그 자신의 변화 과정, 그러니까 사회 자신의 ‘역사’를 늘 참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저기 저 마스크 미착용 관련 광고지의 인식 양상은 이 역사의 참조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일 수도 있다. 어느 현상이든 연속선상에서야 이해되곤 한다. 소위 모든 현상이 저 유유한 맥락에 덧붙여진 메타포처럼 그 의미가 계속해서 누적되며 양상을 달리한다. 언젠가 어느 단어의 의미가 어느 집단이 사용하는 어떤 의미로 출발했다가, 어느 날 해당 단어의 의미는 다른 집단이 사용하는 다른 의미가 되어 있다. 서로 모순되는 각기 다른 타당성의 언어가, 돌이킬 수 없는 불가분의 절대적인 시간성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긍정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처럼 소위 ‘시간’은, 그러니까 역사는 영영 돌이킬 수가 없으리라. 태어난 순간부터 영영 늙어가기만 하는 우리 신체만이 아니라 저 모든 세계 자체가 그 증거물이 아니던가. 그런 식으로 우리가 헛디딘 발자국이 영원히 그 경솔함을 증거하며 세계에 아로새겨져 있고, 또 새겨지는 중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이 절대적인 시간은, 소위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억이라는 처벌을 멈추지 않는다. 언젠가 신체에 새겨진 흉터처럼. 그렇게 우리 삶의 과오는 역사가 흐를수록 우리 자신을 지속적으로 옭아맨다.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속죄라는 짐을 지고 살지 않기로 다짐하더라도, 그의 기억이 스스로 살기 위해 왜곡을 감행하더라도 저기 저 절대적 ‘시간’은, 따라서 ‘역사’는, 바야흐로 ‘삶’은 늪이나 올가미처럼 갈수록 더욱 우리를 옭아맨다.

이런 평범한 시간, 그러니까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종종 벗어나고자 할는지 모르겠다. 모두에게 주어진 이 불평등한 수명, 제각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간이 완전히 새롭게 다시 주어지는 꿈을 꾸기도 한다. 무수한 종교들의 재탄생에 관한 신화들이 그걸 증거하고 있지 않나. 영생에 대한 꿈 또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이 지점에서 얽혀있다 아니할 수 없으리라.

이스라엘에는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다. 50년에 한 번씩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마치 처음 무결한 시간으로 돌아간 모양으로 무해하고 무고한 존재로서 모든 사회 구성원을 되돌리고자 기획된 이 제도에는, 예의 절대적 시간으로부터 탈출해 시간과 관련 없으리라 믿어지는 태곳적 향수로 이 세계 전부를 되돌리고자 하는 환상이 스며있다. 완벽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공들인 탑을 고치기보다 새로 쌓는 쪽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곤 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와 같이 모든 걸 돌이키고자 회고하는 욕망, 소위 태곳적 순수에 대한 과장된 신화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건 거꾸로 우리의 삶이 오롯한 ‘성공’으로만 채워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으리란 허탈한 앎 정도가 아니던가. 우리가 제아무리 같은 걸 다시 느끼고, 다시 마주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건 돌아올 수도 보상될 수도 없으므로.

어쩌면 고대인들이 굳이 ‘순환’을, 생의 ‘회귀’를, 그러므로 ‘부활’을 꿈꿨던 건 그들이 우리처럼 이토록 절망적인 올가미 속에 살고 있었다는 증거일는지 모르겠다. 보름달에서 보름달로의 순환이, 저 추상적인 순환이 역으로 저 ‘달’에 다시 부여하는 ‘성스러운’ 이미지는,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자연의 절대성에 대한 저기 저 이미지는 어떤 사소한 시간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 생은 단 한 번이고 다른 모든 경우의 수들은 소위 간파되지 못하는 ‘바깥’이라는 절망, 그 절망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지나 않았을는지. 우리가 마침내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그처럼 연이어 시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 ‘훼손에 대한 감각’이 예의 절망 안에, 여기 절대적인 시간 안에서 늘상 긍정을 종용하고 있지 않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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