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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Nov 04. 2023

23 직관

시즌 3 FICTION

유아는 점차 필연성을 배워야 한다. 유아가 필연성을 배우기 싫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성숙해보이는 양의 연극적 태도로 이를 대체하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것(필연성)을 이해한 양 연극하는 ‘이미지(태도-내사)’와 이해 자체는 별개의 채널이다. 그는 필연적 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위해 사실 많은 것들이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는 듯, ‘굳이’ 진지하고 성숙한 ‘표정’으로 읍소하기도 하겠다. 거기서 그는 종종 자기 자아상이 붕괴되지 않을 정도 만큼은 무언가 이해했다는 양 굴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예의 ‘이해’를 토대로 ‘의사소통’해야 할 적엔, 그러니까 그게 어떤 논의건 효과를 파급할 수 있는 장에서 아울러 논의를 해야 할 적엔 설령 관객이 자기 자신 뿐이라도 우선 자신이 무얼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논증해 보는 것도 안전할 일이리라. 성숙한 듯, 이해한 듯한 이미지(표정과 태도)만을 가지고서 우리는 종종 그 원리를 알고 있는 양 스스로 어찌나 자주 착각하던가.

감정에 대한 이해로 치자면 그저 동일시는 이해가 될 수 없다. 해당 감정에 다만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당 감정의 구조를 우선 확인하고 효과를 측정하는 최소 필연성에 대한 연산 위에서야, 이후 일견 동일시하는 게 당사자에게 위로가 된다면 예의 ‘이해’를 토대로 동일시를 수행하는 작업이 유효할 수는 있으리라. 여기서 ‘동일시’는 ‘이해’ 이후 대응의 한 양상이지, 그 아래에 있는 감정적 구조에 대한 필연성의 이해 자체가 될 순 없다. 우리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은 바와 마찬가지로, 이 이해(앎)는 어쨌거나 최소 필연성에 대한 연산을 토대로 하는 까닭에 스스로에게조차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어야 보일 모양이다. 요컨대 감정에 대한 이해 이후 그 대응 방식은 때에 따라 ‘동일시’ 외에도 충분히 다른 양상일 수 있겠고. 여기서 대응 방식을 선택하는 기준은 그 나름의 ‘유효성’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 유효성을 ‘추론’하는 단위는 ‘필연성’이고, 그런 식으로 우리는 타인의 감정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 삶이 이미 시작된 이래로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여태 벌써 그토록 ‘대응’하고 있지 않나. 여기서 ‘대응’이라는 단어의 쓰임은, 삶을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애를 쓰는 동시에 해당 삶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소위 (삶에의) ‘긍정’이라는 단어와 유사해 보인다.

유효성에 대해 말하자면, 친절한 인사 한 마디나 어떤 사람의 분위기, 말투나 억양까지도 저 유효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의 인사 한 마디나, 분위기, 말투, 억양 등은 해당 상황에 따라 나름의 필연성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성 자체는 사회적 윤리의 피드백이 아니라 자체적인 윤리로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당 상황을 판단하는 주체에 따라 필연성의 윤리는 구체적으로 다시 구성될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어떤 일탈자는 당 일탈 행위에 대한 위험(사회적 윤리나 사법 기관의 처벌)과 자기 가치관을 섞은 후 이를 다시 해당 행위의 결과에 대한 수지 타산을 적용하여 나름의 유효성을 측정하지 않겠나. 허나, 종종 이념적으로 고안되곤 이후 이념과 관련 없는 보편 기준이라 주장하는 저기 저 사회적 윤리 또한 필연성을 내포할 적이 없지 않다. 사회는 어떤 이상향을 지향[할 수도] 있지만, 달리 어떤 이상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르니까. 전자는 선택(자발)적이지만 후자는 강제(비자발)적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가치관이 무언가 지향[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 어느 경우엔 지향[할 수밖에] 없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앞서 제시한 유효성의 사례로 치자면, 친절한 인사 한 마디나 어떤 사람의 분위기, 말투나 억양이 어떤 상대를 ‘호의’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악의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할 요량이다.

요컨대 사교생활에서 상대에 따라 전략이 바뀌는 건 서로가 가진 결핍이나 가치관 등이 다른 까닭이기도 하겠으나, 그렇게 가치관으로 치자면 가치관 자체를 ‘선택’할 적에 당사자의 자발성이 반영되었는가와 별개로, 이미 선택한 해당 가치관이 행사될 때 ‘자기도 모르게(비자발적으로)’ 적용된 자기 판단의 고정적인 전제(필연성)로 반영될 적이 어찌나 많을는지. 그런 의미에서 가치관의 선택 자체 또한, 자발적이기보다 그리 선택할 수밖에 없을만치 비자발적인 경우야말로 해당 개인의 삶을 더욱 잘 보여주지 않던가 말이다. 목적이 자발적일 때조차 과정을 비자발적으로 만드는 자승자박의 수단을 사용하고서야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경우 또한 어찌나 많은지. 그리하여, 비자발적인 필연성은 우리에게 어떤 ‘사유’를 강제하고 ‘행동’을 강제하며 ‘배움’을 강제하여 ‘적응’을 촉진한다. 지키지 않으려야 지킬 수밖에 없고, 그리 아무리 어기고자 해도 어길 수 없는 이 ‘필연성의 윤리(삶 자체, 또는 운명 자체)’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우리는 이를 타인에게서든 자신에게서든 매번 확인하고 이해하고자 우리 자신도 모르게 노력한다.

그처럼 필연성은 주창자가 근거로 삼고자 하는 자료가 아니라, 자료로 삼고자 하든 하지 않든 연역하는데 피할 수 없으며 없었고 없을 근거를 그 자료로 삼는다. 이를테면 유아적 ‘상상’ 중에 그나마 살아남은 유효한 가설들이 누구의 가치관(이념)에서든 그 뿌리를 이루고 있을 텐데. 혹자가 자기 ‘신념’의 근거로 ‘통념’을 제시하는 습관 또한, 통념이야말로 논증 없이 예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듯한 ‘효과’를 가지고 있으리라 넘겨짚은 까닭 아니겠나. 그렇게 우리는 가치관을 스스로 검증해가며 유아적 ‘상상’을 필연성으로 필터링한다. 요컨대 유아의 거울상(이미지)은 이미 ‘이념(초자아의 중간 매개체)’의 씨앗이며, 저 이념은 예의 필연성을 자의적으로 엮어 스스로 ‘필연’을 논증하며 소위 ‘초자아’가 되고자 애를 쓰는 과정에서 산출된 단서의 목록이다. 언젠가 우리네 발달은 ‘당연히’ 거울상의 이미지를 지나고서도 이념을 달성하고 다시 그 이념을 초과한 이념, 그러니까 초자아를 극복한 초자아(텅 빈 이상으로서의 현실)를 지향하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끝나지 않을 이 노력의 발달과정은 그 자체로 또 다른 필연성, 그러니까 ‘운명’이라 할만하지 않겠나. 그렇게 보면 저 모든 ‘운명(필연성)’을 분석(긍정)하는 건, 그 운명(필연성)의 달성여부와 관련 없이 시도되는 노력과 태도의 문제일 터다.

따라서 이 노력과 태도가 수렴되는 장소, 통념이 애둘러 지시한다고 믿어지곤 하던 필연적 정당성, 그렇게 앞서 무수히 언급한 저 필연성과 운명, 정확성과 실천 사이의 면밀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로서, 그게 관념적 시행착오든 혹 그런 관념적 현실이 지시하는 물리적 현실에서의 시행착오든 간에 당 행간에 숨어들어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효과를 창출하곤 하는 저기 저 무수한 매개물로서, 마침내 필연적인 운명의 ‘정확성’을 감지하는 영역에서 초자아의 극단과 본능의 극단으로서, 달성되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추구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절대적 현실로서, 소위 ‘필연성’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직관’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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