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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Nov 25. 2023

25 타자

시즌 3 FICTION

우리는 수리 연산을 시도할 적에조차 허구를 가정하곤 한다. 이를테면 미지수 X를 가정하는 바와 같이, 기하학에서도 선분 한쪽 끝을 고정하여 반대쪽 끝을 회전시킨다는 가정(가설)으로 ‘원’을 연역해 내곤 한다. 그러나 반성에 기반한 예의 임시 ‘허구’를 통해 도달한 ‘원리’에서 다시 우리는 ‘철저한’ 현실을 재차 연역하기도 한다. 현실에 있는 상황마다의 ‘값’을 미지수 X에 대입하여 구체적인 ‘연역’의 결과를 산출하기도 하고, 모든 반지름이 동일한 원 자체의 특성을 현실에 활용해 ‘절대적’ 현실의 사태를 계측하거나 예측하기도 한다. 나아가 원리에 도달하기 위한 가설(추론)이 여타 원리로부터 다시 거꾸로 연역될 수도 있다. 문제는 원리를 찾는 과정 자체이며, 여기서 이 원리는 사태의 원인인 동시에 필연성을 표현하는 표현 자체일 수밖에 없다.

가령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돌보기 위해 가상의 정신(가설)을 임의로 설정하기도 한다. 때에 따른 무수한 가상의 구조물들이자 임의적 상상을 임상적 유효성으로 여과하여 추론된 이 모델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의 ‘원리’에 다다르도록 이끈다. 이 ‘원리’는 필연성으로 구성되어, ‘직관’으로 통용될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이 직관이라는 최소 단위의 필연성을 얻기 위해, 이 가상의 모델을 종종 연역의 수단으로 삼는다. 무수한 구체적 상황에서 연역된 이 가상의 모델은 다시 직관(가상의 모델 자체)을 그 수단 삼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는 저기 저 모델로부터 추론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추론의 결과물로 임의의 모델을 누적해 두기도 하니까. 판단 이전의 추상적인 상태, 경험의 누적 상태, 아직 법칙까지는 가지 않은 의도적인 유보 상태, 어쩌면 문법이 되기 이전의 클리셰, 수리 연산으로 치자면 여즉 증명되기 전의 ‘공식’ 정도가 예의 모델일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이 임시적인 모델들로, 판단이 되기 전 임의적인 저 관념들로 정신을 구성하여 삶을 꾸려나간다. 예컨대 어떤 ‘개념’은 그게 적용되는 상황에 따라 다른 모델을 구성하기도 한다. 허나 여기서의 ‘모델’은 물리적 현실뿐 아니라 관념적 현실로부터까지 그 유효성을 피드백 받는다. 수리 연산이나 기하학의 공리들을 포함하여 우리 정신적이고 임상적인 삶 전부가, 최소한 부정할 수 없고 여타의 상상으로 대리할 수도 없는 ‘불변의’ (관념적) 현실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어떤 물리적 현실을 지칭하는 용도로 예의 개념(관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관념(개념)을 재차 달리 지칭하기 위해 다시 ‘관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령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칭하는 관념인 ‘자아’를 상정하여 현실을 추론하기 위해 이를 다루기도 하니까.

따라서 기성 (관념적) 이미지들이 과연 어떤 물리적 현실 혹은 관념적 현실을 지칭하고자 하는가의 문제는, 그렇게 지칭하고자 의도하는 ‘정신’의 기제 자체와는 거리가 있다. 요컨대 기호의 이름(관념적 이미지)은 그게 사회적 피드백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에야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설정할 수 있지 않나. 그러한 표현(기표)이 표현 대상(기의)에 얼마나 대응하는지로 이루어지는 여기 이미지의 ‘자명성’은 그저 ‘자의적’인 동시에 ‘상대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의적’ 기호들을 매개하는 임상적이고 통계적인 ‘적합성’들은, 그 명칭의 자의적 통용 방식(상징 자본)에서 분리되어 연구될 수 있을 만치 ‘절대적’이고자 하는 ‘자명성’일 수 있으리라. 여기 비로소 화두가 되는 건, 상대적으로 마음껏 꿈꿀 수 있는 그저 자의적 경향이 아니라, 바로 그 자의적 경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대한 ‘절대적’ 고정점들에 대한 경험(임상)적(으로 누적된)이고 추상적인 탐구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을 뭐라고 지칭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예컨대, 사물에 ‘적합한’ 호칭을 ‘추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관념적 역량(가령 가상의 모델-직관을 다루는 능력)에 관한 문제다.

이를테면 현실을 그저 지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표현 기호를 활용하건 간에 현실의 원리라는 (절대적) ‘관념’을 어떻게 얼마나 다룰 수 있는지에 관한 예의 문제는, 이미 원리 자체의 ‘이해’로서 ‘표현(설명)’과 ‘사용’을 포함하는 직관의 문제이며, 따라서 현실에 대한 대응점이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하는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추상적인 동시에 경험적인 ‘관념’의 문제다. 사물로 치자면 사물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며, 이를테면 사물과 사람 간의, 물질과 관념 간의, 심지어 관념과 관념 간의 상호 영향에 대한 ‘관념’의 문제이며, 그런 ‘관념’으로서의 예의 모델(구조)에의 문제다. 다시 말해, 동어반복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며, 예의 관계들끼리의 다시 관계의 문제이자, 그리 무수히 소급되는 추상적이고 경험적인, 그리하여 ‘유효한’ ‘관념’의 문제다.

가령 우리가 여러 (내적/외적) 현상을 소위 ‘주관적’으로 설명하거나 인식할 수 있다 주장한다지만, 인식은 이미지를 재인식하는 등의 동어반복에 대한 ‘기억’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인식 자체는 기억과 다르다. 말하자면, 현상을 얼마간 ‘주관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애당초 표현 방식의 주관성과 표현 대상의 사태 자체는 거리가 있지 않던가. 실상 표현 이전의 사태 자체는 경험적이고 추상적인, 아울러 ‘절대적’인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표현의 한계를 마주한다.

이를테면, 화자가 겪은 ‘절대적’ 사건 자체가 사후적으로 사건을 구술하는 표현과의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처럼, 화자가 겪은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가령 언어)이 소위 ‘주관적’이라고 해서 표현되는 느낌 자체가 ‘주관적으로 고유’할 리는 결코 없지 않나. 이를테면 예의 주관성 자체도 무슨 패턴(그게 결핍이든 습관이든)으로든 분절될 수 있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므로 주관성이 엮어 내고자 하는 자료 자체도 주관적이지 않고, 주관성이 표현 대상으로 삼는 외부 현실 자체도 주관적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료를 엮는 방식(가령 언어) 자체도 개인 자신의 어떤 결핍이나 습관 등의 패턴이나 매체의 문법으로 ‘설명(표현)’되는 한에서 주관성은 무화될 수 있을 성싶다. 말하자면, 주관성은 그저 ‘주장’되거나 ‘표현’될 뿐이다. 그조차 설득력이라는 외부 기준 아래서만 ‘주장’되거나, 표현 매체의 문법이라는 외부 규칙 아래서만 ‘표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당 관념을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표현 이전의 관념은 언제나 ‘절대적’일 수밖에 없을 양이다. 따라서, 타인과 자신을 포함한 현상 자체(타자)에 대한 ‘관념’은 ‘타인의 주관성에 대한 관념(관심)’과는 그 층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자명한 ‘원리’ 자체는, 곧 필연성의 최소 단위로서의 ‘직관’ 자체는 그 사용자와 상관없이 관념 자신의 작동 양상을 가지고 전개될 수 있다. 누가 계산한들 (그가 틀리지 않았다면) 덧셈이나 뺄셈이라는 ‘관념’의 ‘답’이, 그 연산 과정(표현)의 유사성 이상으로 동일한 바와 같이. 요컨대 ‘주관성’의 신화적 관념을 ‘원리’의 현상적 관념으로 연역하고 탐구하는 와중에서야, 그리하여 ‘원리’에 대한 ‘원리’로 ‘관념’을 소급하여 탐구하는 와중에서야, 때마다의 해당 ‘관념(직관)’을 그 ‘원리’에 맞춰 적용하며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니.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타인(동일시-이입된 관객)’이 아닌 ‘타자(이질적인 세계-바깥)’로 나아갈 수 있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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