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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Dec 16. 2023

26 필요

시즌 3 FICTION

가령 먹고사는 문제, 목숨의 위협이나 그에 비견될 만한 것들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의’를 앗아가는 무수한 자료들 위에서 산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주의가 ‘향하고자 하는’ 욕망의 차원보다야, 우리의 ‘주의’가 ‘향해야만 하는’ ‘필요’의 차원을 우선순위로 살필 수밖에 없다. 그처럼 ‘향해야만 한다’는 정의에서부터 이미 우리는 순위를 매기고 있던 덕택이리라. 예를 들면, 저 흔한 매체에서도 매체 본인들이 주입하고자 하는 ‘욕망’이 실은 그저 ‘향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향해야만 하는’ 예의 ‘필요’가 틀림없다는 종류의 광고(문맥)를 만들고 퍼 나르고자 하는 무수한 시도들이 얼마나 목도되곤 하던지. 언젠가부터 저기 무수한 광고들은 그저 얇은 욕망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심층의 불안을 자극하여 필요를 생산하고자 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와 유사하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에조차 ‘욕망’이 아니라 ‘필요’라고 변명하곤 한다. 가령 휴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굳이’ 생산해 내는 등. 그처럼 욕망에 필요를 덧붙이는 건, 욕망과 필요의 정의에 이미 우선순위가 포함되어 있던 까닭에 이를 조작하여 자기 욕망을 필요의 반열에 올려 두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변명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마치 매체들이 ‘불안’을 조작하여 상품을 욕망이 아닌 필요의 반열에 올려 두고자 하듯. 아무래도 욕망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필요는 이를 요구한 사회나 생물학적 한계 등이 책임을 대신 가져가는 까닭일 모양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욕망과 필요를 종종 혼동하고, 또 힘써 혼동하고자 하고, 그렇게 굳이 욕망인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욕망 아닌 필요로서 자기 행동의 의도를 설명(주장)하고자 하기도 한다(그러나 설명 이전 보이는 그대로의 통계들이 관객에게 우선 제시하는 바가 자주 있지 아니하던가). 그리 덧입고자 하는 ‘필연성’은 종종 예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매개에 불과하다. 휴식이 너무나 ‘필요’해서, 기질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한 나머지 세계를 누리는 안식이 ‘필요’해서, ‘욕망’하는 게 아니라 ‘필요’해서, 그렇게 ‘필요’하도록 태어나서 그는 욕망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행동을 할 뿐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아울러 그렇게 선전하면서 매번 ‘욕망을 해소한다’. 여기서조차 그는 종종 ‘욕망’의 변명으로 ‘필요’를 든다. 그러나 그는 욕망 덕택에 행동하면서도 그 실천의 근거에는 욕망 아닌 필요를 들어, 이미 필요가 욕망보다 우선순위에 있다는 자기 앎을 스스로 거듭 반증하는 셈이다.

혹자가 이야기하듯, 어떤 무수한 ‘필요’들이 우리 ‘욕망’을 ‘과연’ 희생시키고 있나? 과연? 그와 유사한 담론들이 근거 삼는 건 결국 언제나 소위 ‘도덕’ 아니던가? 혹자는 종종 ‘도덕’이라는 명분을 통해 예의 우선순위를 뒤집고자 한다. ‘희생’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어, ‘욕망’의 의미 속에 ‘권리’의 개념을 펴 바른다. 이 시점에서 ‘필요’는 외부의 폭력으로 ‘굳이’ 탈바꿈하곤 한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한 필요, 생물학적 한계로써의 필요,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필요, 인간의 ‘소위’ 자유(욕망)가 억압당하는 저기 저 ‘필요’로 삶이 구성되는 건 어떤 관객에게는 힘껏 비극적으로 제시된다. 허나, 그렇게 욕망의 해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연사들조차, 현실 위에선 어쨌거나 서로의 욕망이 해소되는 경로에 대한 규칙(욕망을 억압하는 양태)은 ‘필요’하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처럼 ‘필요’가 사회에서 온 것, 생물학적 환경이라는 외부에서 온 것이고 ‘욕망’은 내면에서 온 것이라 ‘필요’로 ‘욕망’을 억압하는 건 외부가 내면을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권리’상 비‘도덕’적인가? 그러나, 어째서 외부는 내면에 영향을 줘선 안 되는가? 어째서 내면만 외부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보다 나아가, ‘과연 욕망이 내면에서 오긴 했는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이는, ‘과연 욕망이 내면에서 올 수 있긴 한가’의 문제로 나아가, 그리하여 우리 내면이 스스로 ‘욕망’을 창조할 수 있긴 한가(‘자족’에 관한 환각)의 문제로까지 더 나아갈 수 있다. 굳이 십분 양보해서 욕망이 외부의 아무런 참조 없이 스스로 자생한 초월적 산물이라 하더라도, 어째서 저 욕망은 ‘굳이’ ‘권리’를 타고나는가? 소위 주체성의 황당한 신화는 그 출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다시 말해, 어째서 ‘굳이’ 주체적인 바와 아닌 바를 나누어야 하는가? 재차 다시 말해, 어째서 ‘굳이’ 주체적이어야 하는가? 저기 저 최소한의 ‘필요’로 번역되는 ‘책임’의 억압을 굳이 모조리 부조리로 치부하(고 싶으)면서 발산하고 또 해소하고자 하는 무수한 욕망들조차, ‘타인의 욕망’으로부터의 견제를 통해, 그리하여 소위 ‘현실원칙’이나 ‘힘의 논리’를 통해 끝끝내 교정되지 않나.

그러나 그와 관련 없이도, 욕망 자체는 결코 자생적일 수 없다. 우리는 아무 자료 없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위 ‘모방’의 산물 아니던가. 그리하여, 과연 예의 ‘권리’나 ‘도덕’조차 그렇게 스스로 탄생했다 가정된 ‘욕망’의 작품이 아니라 어떤 ‘필요’의 산물 아니던가 말이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욕망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다른 의미에서 욕망은 그 심층에서 언젠가의 무슨 관념적인 필요를 그 출처로 삼고 있지나 않을는지. 이를테면 무언가 직면하지 못한 결핍을 결핍으로 바라보기 힘들어 마치 욕망인 양 자의적으로 간주하며 억압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요컨대 여기서 예의 욕망이 감각적인 욕구와 구분되듯, 심층의 필요 또한 비로소 욕망과 구분될 수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무수한 소위 ‘작품’에서 발견되는 건, 발산된 욕망이 아니라 다만 정교하게 구성된 ‘필요’ 아니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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