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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Dec 23. 2023

27 종합

시즌 3 FICTION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토대로 우리 내면을 추리하곤 한다. 표면 아닌 내면에 관한 한 우리 모두가 누구나 무지 속에 있는 까닭이다. 요컨대 자기 내면에 관해 스스로 무지하다고 설명하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무지하지 않다고 확신에 가득 차서 자랑스럽게 연설하는 혹자는 '더더욱' 자기 내면에 관해서야 말로 영영 무지할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이는 표면 위 우리네 의식처럼 표층 아래 우리 내면 또한 연이어 변모하는 중인 덕택이고, 따라서 우리가 우리 내면에 관한 앎을 때마다 다시 추론할 수 있을지언정 영영 확신에 가득 차서 심연을 거닐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굳이’ 내뱉기란 쉽지 않을 양이다.


가령 우리 행동이 우리의 어떤 내면을 반증하고 있는지 그 해답이 설령 명쾌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의식을 사후적으로야 겨우 추론할 수 있을 테다. 우리는 외부에 대해서 무지한 모양으로 우리 내면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고, 외부에 대한 무지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바와 같이 내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우리는 늘 다시 추론해야 한다. 이를테면 외출하고자 방금 벗어난 집 안에 본인도 모르게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행위가 반증하는 게 지금 이 외출(가령 출근)이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일 수도 있듯. 그처럼 우리는 검산(반성)하면서야 '유효할'지도 모를 가설을 설정할 수 있다. 우리는 예의 검산 위에서야 다양한 필연의 가설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유효할 허구를 가정하고 검증하여, 이를 폐기하거나 정교하게 고도화한 후 다른 사례에 이를 적용하며 더욱 고도화하기도 하며 쌓아 올린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태를 검산하는 과정에서 유효한 가설을 상상하고, 비로소 추리한다.


소위 ‘상상’의 산물인 예술 작품이 관객이 스스로의 내면을 추리하도록 돕는 건, 그와 같이 자기 내면에 관심을 가진 검산(반성) 위에 있는 관객에 '한해서다'. 그렇게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임상 위에서 살아가며, 그렇게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생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리 연마하고 가공한 우리 태도를 포함한 삶 자체뿐 아니라 온갖 허구를 포함한 저기 저 무수한 ‘작품’들은, 저자 본인들이 겪어 온 사태에 대한 ‘검산의 결과’인 동시에 그 결과 위에서 다시 또 정교하게 상상되고 검산 되어 유효하고자 하는 그 자체 ‘가설’들이자, 그렇게 관객의 추리를 촉발할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매개물일 터다. 우리는 이토록 온갖 유사한 매개물 위에 산다. 이는, 사태(예컨대 자기 내면)를 임시로라도 검산할 수 있을 기준으로서 유효한 ‘매개물’이자, 차후 재차 검산할 가설들을 우선 상상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매개물’이고, 그렇게 ‘절대적’인 대상을 추리할 수 있는 근거로서 생산되고 재생산된 ‘매개물’인 이것은 ‘현실’에 접근하는 자료가 되는 한에서의 ‘절대적’인 ‘관념’들에 대한 ‘가설’로서의 '가공된' ‘작품’들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관념적인 가설들이 우선 허구로서 다루어진다면 그건 유효할 허구(이를테면 예비 법칙)로서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유효할 허구를 통해 도달한 법칙에서 다시 현실로 진입하기를 (우리 내면과의 소통을 포함한) 온갖 의사소통(표현) 위에서 반복해서 시도하고 있다. 거기서야 비로소 우리는 종합적으로 추리(상상)하고자 한다 할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분석은 예의 추리(종합)의 일부이며, 분석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분석과 아울러 이 ‘유효할 허구’를 ‘창의적’으로 생산(표현)해 내고 정밀하게 검산해야 하지 않겠나. 요컨대 기성의 필연성을 긍정하면서, 나아가 저기 저 무수한 행복과 불행을 모조리 긍정하면서, 같은 조건으로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배열(표현)’을 다시 또 새로이 찾아내야 하는 셈이다.

그처럼 유효하게 창조된 '표현(배열)'은 우리 내면을 우리 자신에게 설득할 뿐 아니라, 예의 내면과 외부 현실을 아울러 긍정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설득하여 비로소 화해시키거나 변화시킬 수도 있으리라. 그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종합은, 필연성을 토대로 '창의성' 위에서 전개한 '허구'를 주요 요소로 포함하고 있을 터다. 가령 서로의 추리 방식이 그토록 다르더라도, 각자 스스로 추리하고자 얼마간 시도했다면 남겨진 그 시도의 흔적을 통해 서로의 다른 방식에의 설명에 어느 정도는 접근 가능한 것처럼. 이는, 서로가 아무리 달라도 각자가 (우열과 상관없이) 응용의 교두보 삼을 수밖에 없었던 공통(동일성 혹은 동등성)의 포석(필연성-직관)에서 매번의 추리가 다시 시작되고 통합되고 고도화되어 비로소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포함한) 갖은 의사소통(표현)을 경유하여 ‘전달’되고 ‘정제’되어 발달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우리는 여러 소통을 통해 유효한 허구를 우리 삶의 ‘배열(표현)’ 안에 편입시켜 배치하며 달리 또 새로운 ‘유효한 허구’를 하나의 표현 방식이자 작품으로서, 또 삶으로서 스스로에게 제시하며 (분석을 포함한) 종합(추리)을 거듭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을 포함한 세계는 어떤 원인을 품은 결과로써 이미 어느 원인의 '표현'이고, 거기서의 원인은 이미 가능성 자체이며, 이 원인의 표현으로서 결과(우리 삶을 포함한 세계 자체)를 재차 구성해 나가기 위해 예의 원인의 유효성에 우선 도달하고자 원인을 먼저 증명(표현)하려고 우리는 표현(증명) 방식(가설-유효할 허구)을 창작하고 매개해 결과를 재차 연역(추론)하여 '종합(추리)'을 시도하는 중이리라.

따라서 거기 개별 표현의 단위는, 기준 없는 우열의 발산이 아니라 수렴된 동등성의 개별 속성으로 다루어져야 하지 않겠나. 가령, 분석에서 가설(허구)을 거쳐 증명(표현)을 넘어 종합으로 매번 다시 나아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더 좋고 더 나쁜' 등의 상황과 화자를 미리 설정해야 도달 가능한 특수한 요소(우열, 탁월성 등)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발산적 '판단'이 아니라, 그와 같은 '감상적 판단'의 기초 자료가 되는 상황 자체나 화자 자체 등을 '동등한' 일반성의 개별 개념으로 두는 '차이'에서 출발해야 할 요량이다.

이처럼 '종합'은, 가치 판단을 위한 우열이나 탁월성을 기초로 한 비대한 자아의 동어반복일 리 없으니. 그리하여 해당 '종합'을 수행하는 화자 자신까지도 종합을 '전개'하는 요소의 일부로 삼는 존재의 동등성을 토대로, 다시 종합을 전개하기 위해 적합한 '단위'를 찾는 과정 자체가 이미 예의 전개 자체이자 종합의 과정이자 목적이 될 수밖에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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