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채 Dec 31. 2023

28 바깥

시즌 3 FICTION

마치 판정승에만 목을 메는 어느 복서도, 실은 스스로 몸담은 스포츠의 기원이 길거리 싸움이라는 걸 이미 아는 양으로. 학술의 기본은 선대 학자에의 인용이나 주석, 비평과 같은 내부 이론의 동어반복적 한계(동일시) 자체 따위가 아니라, 그러한 당 이론의 한계를 포함한 삶 전부라는 바깥에서 자기 자리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을는지(주해의 권위자를 통해서만 독해가 가능한 문장 더미들은, 그리 주해된 결과물인 주석의 더미들까지 포함하여, 논증보다야 그저 자랑스러운 교리(동어반복)에 가깝겠지만. 그러한 자의적 동어반복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언어는 이미 얼마간 타자 간 약속이며, 그렇게 우리는 소위 '논증(바깥)'에 다다르곤 하지 않던가).


우열로 말하자면 내부에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자체보다, 서로 상충되는 유전자 중 무슨 유전자가 과연 우리 신체에 발현(표현)되었는가라는 유전자 자체의 바깥에 설정된 기준이 당 유전자들의 '우열'을 비로소 판가름하는 모양이다. 여기서의 '열성'과 '우성'은 그 기준이 명확하다. 이를테면 군대에서의 계급과 같이, 어떤 기준을 개념으로 고안하고 이 개념에 해당하는 요소를 수적으로 나열하여 '우성'으로 구별되는 요소를 더 많이 가지면 우등하고 '열성'으로 구별되는 요소를 더 많이 가지면 열등하다는 식으로.


요컨대 유아에게도 우열의 (개념이 아닌, 개념 달성 이전의) '느낌'은, 우열 이전 선악의 이분법을 취득하면서 이미 예견되고 있는 양 보인다. 허나 여기 '선악'에서 마찬가지로 구분되는 건 소위 '개념'이 아닐 터다. 실제로 구분하는 대상(개념이 아닌 느낌)은 '나와 구분된(다른) 타인', '타인과 구분된(다른) 나'에 불과하리라. 가령 그조차 구분하기 이전의, 분리 이전 자아조차 없을 시절의 (분리) '불안'은 그리 분리할 '미래'를 이미 점치고 있는 불안으로써, 하나의 '미래'라는 '개념'을 취득하기 이전에조차 이미 이를 (개념을 달성하기 이전의 느낌으로) 견지하고 있는 모양으로 보인다. 그렇게 대상이 있는 '공포'에 비견하자면, '불안'은 그 자체 대상이 정의되지 않는 방식으로 미증유의 무슨 심연과 어떤 몸통을 같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심연에서부터 우리는 '분리'를 매번 다시 경험한다. 우리의 언어가 종종 오해를 사는 양, 우리 소유의 사물은 점차 낡고 우리 자신은 늙는다. 우리는 각기 스스로 만든 자기 이상에조차 쉬이 도달할 수 없다. 설령 쉬이 도달했다 가정된 이상조차 애초에 생각했던 바로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거나 금방 다른 이상으로 대체될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늘 확장된 '자아'를, 애정 어린 소유물을, 소위 '자아'를 비대하게 살찌우는 관념적이고 정서적인 저 '소유물들'을, 곧 저기 저 '동일시의 대상'들을 무수하게 잃어버려 왔고 또 잃어버려야 한다. 억울하거나 말거나.


사실 저 '대상'들은 그게 인격이든 사물이든 애초부터 우리 자신의 일부일 수 없었는데,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의 분신이라 믿었던 예의 여러 대상의 '배신'은 어째서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 주는가? 그건, 저와 같이 우리가 일종의 '동일시'를 통해, 그런 환각적 우회로를 경유해 '누구나' 근본적인 '고독'을 위로받곤 하는 까닭이 아니겠나. 그렇게 살피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유아적 우열의 개념에서 좋은 것(우성)은 '나(자아-내부)'에게 속한 동일시의 환각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나쁜 것(열성)은 '타인(타자-외부)'을 상기시키는 이질적으로 불편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원시적 관성(자기애)으로 종종 돌아가곤 하나 보다. 그처럼 '우열'이라는 '느낌'의 뿌리에 있는 원시적 관성인 자기애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환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필터링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기능을 그 주요 효과로 삼는다. 말하자면, 환각을 유발하든 주의력을 조정하든 우리가 보는 것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미리 '기획'되어 '투사'되는 '원시성(자기애)'을 가지는 중이다.


그렇게 '유아'는 현실의 동일시 요소만 긍정하고 이질적 요소는 부정하는 상상 속에서 자기만의 '자아'를 구성하며, 그렇게 도무지 부정할 수 없을 만치 곪는 문제(잡동사니)만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며 서툴게라도 일단 살아간다. 거기서 그가 그렇게 기획하여 투사한 현실(주관 현실-환상)은 이미 또 다른 그 자신의 '자아'로 편입되고, 그런 방식으로 '자아'는 현실을 잠식하며 점차 비대해진다. 그와 같이 우리의 '자아'는 비대해지는 관성을 '누구나' 제 1원리(자기애)로 가지고 있을 터다. 그러나 다시 더 내려갈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교차) 동일시 요소와 이질적 요소를 구분하려면, 우선 그 자료가 되는 현실 자체를 언젠가 은연중에라도 인식했어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 어떤 환각적 상상 속에서도, 그 상상의 기초 자료는 그가 어디서 보고 들은 언젠가의 '현실'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을 수밖에 없을 모양이니.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자아'의 예의 비대해지려는 취약한 '관성(자기애)'을 고쳐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서가, 바로 여기서 발견될 수 있을 성싶다.


여기 밑바닥에선, 동일시할 현실도 현실이고 이질적인 현실도 현실이다. 유아의 근본적 인식에서조차 부모의 품도 현실이고, 걸음마를 시도하다가 넘어진 바닥 또한 현실이(어야 하)니까. 그런 현실 중에서 인식하고 싶은 현실만 반복하고 싶은 게 또한 우리네 정신적 현실(자기애적 관성/나르시시즘)일지라도,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여기서 이질적인 현실에 집중해야 겨우 (절대적) 현실에 대응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유아의 '이질적인 현실'로써의 '걸음마'의 학습은 언젠가 타인과의 '협업'이 되고, 달리 또 언젠가는 '책임'이 되어, 말하자면 '이질적인 현실'인 동시에 '자명한 현실'이자 '숙련된 현실'로서, 그 대응 역량으로서 당사자의 삶을 구성하리라. 이처럼 숙련된 현실 대응은 또 다른 욕망의 성취를 차후 그릴 수도 있을 양이므로. 그러나 저와 같이 어떤 명분을 들이대더라도, 그러니까 유아가 이질적인 현실을 감내해야 할 명분이 소위 사회적 압력이건 개인적 욕망이건 상관없이 그는 언젠가 어쨌거나 '유효성'을 가져야 그 자신의 욕망이든 사회적 책임이든 현실 인식이든 수행할 수 있다. 가령 그 유효성이 그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고 인정하여 보살핀다 주장하는 모순적인 방식으로 '통제')하는 능력이든, 외부 현실을 통제하기 위해 돈을 버는 능력이든 상관없이, 이 유효성이 우리에게 우선 요구하는 건 무차별적 현실의 인식이자 예의 현실에 유효할 허구의 창작이며 또 분석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의력을 두어야 할 대상은, 이미 인식으로 그 기울기가 과잉으로 쏠려 있는 '동일시의 동어반복적 대상'이 아니라 '이질적인 대상'이리라. 우리는 우리가 환각적 상상으로 부정하고자 하거나 의도적으로 잊어 부정하고자 했던 저 무수한 대상들을, 저기 저 '호불호'의 기원 이전으로 되돌아 내려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늘 추리해 내야 한다. 물론 그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식하고자 한다는 주장에서의 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 또한 당연히 하나의 환각적 가정에 지나지 않겠으나, 이를 위해 도리어 '부정하고 했던 현실'을 '우선' 인식하고자 영영 시도하는 태도가 비로소 '유효한' 현실적 태도가 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우리는 '우성'에 동일시(내사)하고 '열성'을 배척(투사)하기보다, 우리의 이 메커니즘 자체를 유효성의 측면에서 늘상 견지(검열)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열' 자체가 아니라, 그처럼 기준이 필요한 여러 개념들이 '자아'에 기준 없이 적용되어 저 '자아'를 무차별적으로 비대하게 하려는 관성(자기애/나르시시즘)에 대한 예방(검열)일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타자(이질적인 대상)로 나아가야 한다는 건 우리 자신(내부)을 타인(외부)에게 타인의 타인(외부의 외부)으로 '굳이' 제시하고자 해야 한다는 기이한 태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타인'에게 이질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타인의 타인'으로 '굳이' 스스로를 출두시키고자 하는 관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이를테면 '나'는 '외부'이고 '너'는 '내부'이니 '너'는 '나'를 당연히 이해하고자 애써야 한다는 식의 전치된 응석은, 실상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어 자신을 '바깥' 그 자체에 동일시하는 저 낡은 '타자의 이미지'에 고착되어 멈춰 있다. 여기서 고착된 '타자의 이미지'는 타자 자체가 이미 아니니까.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당연히' 모두에게 서로 타인인데도 불구하고, '우열'의 원시성을 투사한 결과물로서 스스로를 타인에게 ‘타인의 타인’으로, 그러니까 '더' 타인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여기 이 원시성은, 동일시를 극복해야 한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양 포장을 시도하지만 실상 본인의 자기 동일시를 극복하지 않아야 할 변명(명분)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타자로서 제시하는 데 고착된 저 관성은, 말하자면 스스로 타자(바깥)에게 나아갈 자신도 의도도 없어 온갖 타인(바깥)을 자신(내부)에게 아매려 의도된, 그러니까 바깥으로 걸어 나가기 싫어 자신을 바깥으로 상정하려는 비틀어진 응석(자기애/나르시시즘/가짜 신비주의)에 불과할 양이니까.

환대라는 개념으로 치더라도, 온갖 타인(관객)에게 자기 자신을 타자(무차별적 현실, 낯선 바깥 등) 자체로 제시하며 '환대'를 종용하는 여기 이 자기애적 콩트(응석/도피)는, 타인에게 자신의 '(타자적) 이미지'를 강요하고픈 자기애적 현실 부정에 불과할 터다. 반대로 우리가 저기 저 타자(바깥)를 환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환대를 받건 받지 않건 상관없이, 혹은 환대받을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를 환대하면서야, 그처럼 우리가 이질적인 대상으로 여겼던 저기 저 인식하기 싫은 불편한 현실(타자)을 '우선' 환대해야 우리는 ‘무차별적 현실(타자/바깥)’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을 모양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질적인 동시에 자명한 바로 그 현실'을 인식해 나아가고, 그게 좀처럼 쉬이 인식할 수 없는 경험적이며 추상적인 대상이라는 사실을 점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와중에도 여전히 같은 길을 나아가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하여, 어떤 방식의 동어반복이건 이를 벗어나 ‘타자’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자발적('이미지/욕망'의 동어반복)인 방식이 아니라 비자발('이미지/욕망'의 '바깥')적인 방식으로 해야 할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하기 싫은 ('예상 밖의' 혹은 '폭력적인', 가령 '적응이 강요된') 현실만이 ‘현실 인식의 대상(바깥-현실)’이 되는 셈이다. 그처럼 '환대'의 차원에서조차, 우리는 저 무차별적 현실(타자)을 모두 ‘환대’하기 위해 ‘불편한 현실’만을 ‘오직’ ‘우선’ ‘환대’해야 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27 종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