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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an 06. 2024

29 허구

시즌 3 FICTION

우리가 상상해 내는 관념으로서 허구는 무수한 관계를 그 자료로 삼는다. 이를테면 사물과 사물 간의, 나아가 사물과 사람 간의, 더욱이는 사람과 사람 간의, 심지어는 관계와 관계 간의 관계를 토대하는 이 무수한 ‘허구’는 어떤 통계적인 개연성으로 그 관절이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최소한 우리 관념은 우리 자신의 앎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겠으므로, 관념 바깥의 도움을 받아야 동어반복이 아닌 자기와 다른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나. 이를테면 관념 자신이 현실에 내놓은 결과물을 다시 자기 자신의 자료로 삼는 양, 그러니까 마치 스스로 관련된 관계의 양상 자체들 간의 다시 관계를 거듭 자기 도구이자 자료로 삼는 '상상'처럼.


관념 바깥에는 무엇이 있나?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응이, 또한 예의 대응을 토대로 산출해 낸 해석을 포함한 다시 저 대응들이 우리의 ‘관념’을 이루고 있다면, 설령 우리의 관념(정신생활)이 그토록 허구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관념은 관념 자신이라는 국경 밖으로 자의(능동)적으로 나갈 순 없으리라. 위에서처럼, 우리가 관념을 전개하는 방법적인 방식(이를테면 상상의 방식)의 측면에서조차 애초의 자료를 ‘(바깥)현실’에 거듭 토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니.


따라서 관념이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무언가 자료 삼아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관념 자체도 하나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게 유효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러니까 그게 현실에서 도피하는 공상이든 현실에 대한 공상이든 간에 공상 자체도 현실의 양태적 기전 중 하나일 테니까. 더 정확히, 공상하는 인간 자체부터 이미 현실에 속해서 작동 중에 있지 않나. 그러므로, 완전한 도피도 완전한 인식도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저 방향만 있을 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향 위에서 우리가 허구를 생산하는 메커니즘 자체를 다시 우리 허구의 '유효한' 자료로 삼을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 관념이 관념으로부터 떨어진 물리적 현실을 ‘생산’한다면, 관념은 이 산물을 다시 자료로 삼을 수도 있을 모양이다. 저기 저 관념의 ‘산물’이 비록 애초에 관념으로부터 생산되었더라도, 이를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는 관념은 저 ‘산물’을 생산했던 이전의 관념과 다른 관념을 이후 생산해 낼 수도 있을 테니까. ‘생산’과 ‘수용’은 어쨌거나 다른 과정이지 않던가.

가령 우리 관념의 흔한 산출물로 ‘기호’가 있다. 우리 관념 안에는 종종 ‘기호’가 실재한다. 간혹 우리는 '이미 유통되는' 관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 얼마간 유통될 수도 있을 기호를 생산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호를 통해 다른 관념을 생산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시 생산된 관념이 기호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이 기호를 종이에 굳이 끄적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머릿속으로 기호를 통해 ‘전개’하고는 한다(여기서 기호는 우리 내면과 표면 사이로 '유통'된다). 예컨대 종이에 숫자를 끄적이며 연산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암산을 할 적도 있다. 요는 우리가 상상한 허구를 전제로 다시금 다른 상상을 전개한다는 전개 자체에 있다.

따라서 그게 논증이건 창작이건 간에, 허구 자체는 관념이 현실과 상호작용한 ‘전개’의 흔적이다. 전개는 집단으로도 일어난다. 혹자가 논증해 둔 공식이 다른 이를 통해 전개되어 새로운 공식을 산출하기도 하고, 해당 공식(논증)이 다른 영역에서 응용되어 기계를 작동시키거나 상황의 작동 논리를 설명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혹자가 창작한 이야기가 다른 이의 관념을 자극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고, 해당 이야기가 다른 영역에서 응용되어 관객이 시청하는 연극이나 영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전개(유통)' 위에서의 단위는, 그게 '허구'든 '기호'든 어떤 관성의 관념이든 간에, 이는 이를 처음 저술하고 상상해 낸 저자와 상관없이 스스로 '작동'한다. 요컨대 관념은 관념의 저자와 상관없는 '유효성'을 얼마간 따로 가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따라서 허구의 ‘유효성’이 현실을 얼만치나 작동하게 하는가로 가늠될 수 있다면, 허구 자체 또한 현실 위에서 창작된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러니까 예의 허구가 다른 허구를 얼만치나 작동(촉발)하게 하는지로도 이 허구의 ‘유효성’을 살필 수 있으리라.

예의 허구가 허구 아닌 영역에서 현실을 작동하게 하는 게 아니라면(가령 연구에서의 임시 가설처럼), 다른 허구의 생산을 자극하는 허구가 가진 유효성은 일단 통계적인 개념일 터다. 무수한 허구를 생산하도록 자극하는 이 재차 허구는, 달리 말하자면, 창작욕을 자극하는 저기 저 작품들은 어떤 작품(허구)인가? 그러니까 관객이 도무지 관객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자리를 욕망하게 하는, 작품을 향유하기보다 다른 작품을 기어이 생산하도록 추동하는 이런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 말하자면, 기호를 생산하도록 추동하는 기호, 이를테면 작품에 대한 작품, 기호에 대한 기호, 허구에 대한 이 허구는 그저 해소로 끝나지 않는 순환 고리를 만드는 욕망에 대한 욕망 자체로의 승화가 아니던가. 거기서 마침내 저 욕망은 사회적 요구의 억압이나 본능적 충동도 아닌, 그러나 이들을 납득(긍정)하며 자료 삼고 그 위에서 전개되는, 그리하여 그저 작품 자체로서의 충동(욕망)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처럼 저기 저 허구에 대한 허구는 욕망까지 지나치리라. 그리 승화되어 맞닿은 욕망이 그저 현실을 억압(본능의 발산/추구)하거나 현실에 억압당하는 게(사회적 요구/명령) 아니라, 예의 희비극의 현실 모두를 모조리 자기 자료로 삼을 수도 있을 양이다. 이와 같은 욕망에 대한 욕망은 현실을 긍정할 수밖에 없겠으므로. 그처럼 어떤 허구는 어떤 현실을 재차 산출하고, 그리 산출된 허구가 구성하는 현실을, 말하자면 더 이상 허구가 아니게 된 이 유효한 허구를 다시 자기 자료 삼는 과정 중에 있는 재차 허구다. 곧 모든 허구는 언젠가의 어느 현실에 비롯되어 전개되고, 어떤 허구는 이 전개를 기원 삼아 다시 전개되는 와중에 있다. 요컨대 전개 자체에 대한 충동을 무어라 부르건 간에, '저자와 상관없이' 자생하는 단위로 이루어진 이 전개(작동)는 허구와 허구가 아닌바 모두를 그 희비극에 상관없이 모조리 자기 자료로 삼고 다른 전개를 산출하며 전개된(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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