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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an 13. 2024

30 법칙

시즌 3 FICTION

일견 휘발되어 사라질지도 모를 우리네 사소한 '허구'들 중 어떤 것은, 저자의 기획이나 혹자의 해석이 작동하기보다 먼저 유통되어 외부(바깥)로부터 우선 회자되는 방식으로 그 효력이 발동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서양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나 '나니아 연대기' 등 익숙한 '신화'와 같이, '흥부와 놀부'나 '혹부리 영감'은 어떤 종류의 참조 사항으로 묶여 다루어지기도 한다. 각각의 등장인물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보다, 서사 전체를 혹은 서사 내부 인물들을 쉬이 도용하여 가져올 수 있는 이미지들이 사회적으로 지목하는 게 종종 있으므로. 종종 이런 상징들은 사회에 새로 진입하는 개인에게 규범적 명령을 그 위협의 흉터로 새기기도 하겠으나, 달리 해석하는 어느 맥락에서 추상적인 '함의'를 소유하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정신분석이 아버지 살해를 쉬이 설명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도용한 바나, 오늘날에 와서 재해석되곤 하는 '놀부'의 '돈'과 성공에 관한 욕망과 같이.


이런 예시에선 이미 받아들여진 우화(허구)가 먼저 있고, 그에 관한 해석의 여지가 등장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나의 우화에 사후적으로 온갖 이론들이 적용되기도 한다. 그렇게 간혹은 거기 우화라는 허수아비가 온갖 이론들을 흥미롭게 소개할 수 있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무수한 해석들이 다양하게 인용되는 우화가 가진 저 유명세의 근거를 설명(교훈의 사회적 합목적성 등으로)하고자 하지만, 실상 이런 우화 자체가 여타의 해석을 '흥미롭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되는 사태 자체가 당 유명세의 발판인 경우도 많다. 해석의 호불호를 떠나서, 여기서 우리는 해석 자체만을 학습하는 지겨운 여정에서 흥미로운 우화의 다양한 해석들을 살펴보는 여정으로 옮겨올 수 있을 테니.


그처럼 우화는 해석을 세인들에게 소개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간혹은 도리어 해석이 우화를 세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허나 실상 해석 자체도 하나의 우화가 아니던가. 우리는 사소한 법칙조차 이런 우화(허구) 없이 학습하기 버거울 텐데. 어린아이가 뺄셈을 배울 적마저, 정수를 논증한 후에 뺄셈을 연역하기란 요원한 일이지 않나. 도리어 뺄셈 자체를 은유하는 하나의 우화를 통해 일단 논증을 우회하곤 한다. 요컨대 열 개의 사과를 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고양이가 네 개를 훔쳐 달아났다면 몇 개가 남느냐는 식이다. 이처럼 우리는 유효한 허구를 통해 법칙에 도달하지만, 거기서 그리 도달한 법칙 외의 나머지 요소는 언젠가 유효했을지언정 끝내 법칙에 대비되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는 '법칙'뿐 아니라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마저 그 해석의 진위를 떠나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우화(허구)를 통해 그 진실을 우선 은유하여 해석해서 이를 교정하여야 진위에 도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양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우선 상상한다. 그리고 차후 연역한다. 논증이 고민을 위시한 엄밀한 표현의 방법인 까닭도 거기 있다. 허구 자체로는 무슨 의사소통도 경유하지 못하고 또한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겠고, 또 우리는 허구(상상) 없이 어떤 사유에도 도달할 수 없겠으나, 허구(상상)만으로 유효성을 검증할 수도 의사소통을 시도할 수도 없다(이 상상과 연역 사이의 관절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 역량을 단련시키는 소위 '놀이'가 도처에서 발견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가령 뺄셈이라는 연산 개념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서 소위 '허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으나, 뺄셈이라는 개념을 확증한 채 이에 대해 탐구하거나 논의하고자 할 즈음에 필요한 건 이제 '상상된 우화(허구)'가 아니라 '상상된 논증(허구)'이니까. 말하자면 허구(우화)를 통해 도달한 법칙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과정에도 허구(논증-가설)는 필요할 모양이다. 분명 우리가 허구와 허구가 아닌 것을 구별해 내기란 어느 대목에서 요원한 일이겠으니. 우리의 관념적 습관뿐 아니라, 관념이 매개하는 저 모든 기호 또한 모조리 허구적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우리는 허구를 통해 매번 유효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것이 설령 허구에 대한 허구라 할 지라도.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세운 유효성을 축으로 이 '허구'들을 걸러내고 연산하는 등으로, 허구에서 비롯된 현실(법칙)을 연역한다. 그러니까 거기서 우리가 연산하는 질료는 이미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서 산출된 '허구(가령 기호)'일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가 누가 누구보다 허구(현실)를 특히 더/덜 (법칙 아닌) 그 자료로써 다룬다는 명제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건, 실상 누구나 모조리 허구만을 다루고 있고 우리 역량은 오직 이 허구의 유효성(설령 그 유효성이 다른 허구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하더라도)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추출된 어떤 법칙, 어떤 현실은 걸러낸 허구 자체가 아니라 허구를 그리 걸러내는 방식, 연산하는 방식, 비로소 연역하는 과정 자체에 있는 어떤 관계의 지형도일 모양이다. 요컨대 허구에 현실이 대응하는 게 아니라, 허구들끼리 상호 간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포석(고정점)들이 우리의 법칙(현실)을 구성하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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