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화와 거울상
시즌 1 PROJECTION
무엇이 신화인가? 이를테면 성장을 위한 배후 누군가의 '의도'로 그 자신에게 시련이 주어졌다고 믿는 태도와, 해당 시련 자체를 스스로 이용하고 긍정하여 기량을 확대하겠다는 그 자신의 태도는 다르다. 전자는 신화적 신앙이고 후자는 '절대'적 노력인 까닭이다. 그러나 어쨌건 간에 둘은 같은 양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둘의 차이는 '일단' 배후의 인격을 가정하느냐, 자기 자신의 인격 위에서 기계적 사실들만을 인정하느냐 정도로 볼 수 있을 터다.
아이의 발육 과정은, 그리하여 어떤 개체가 사회에 적응할 때, 그는 원시적 개인이 문명화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밟을 수밖에 없다. 동일한 다른 누군가가 문명 밖에서 성장할 때, 그는 어쨌거나 문명화되지 못한 개인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하여 아이(원시 개체)는 모든 사물에 자기 자신을 이입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모양이다. 요컨대 원시인이 자신을 덮친 재앙에 인격을 부여하여 소위 정령을 숭배하듯, 아이는 장난감에 인격을 부여한다. 그들에게 세계는 인격 투성이다. 예의 재난을 의도한 배후의 인격을 찾고자 애쓰고 가정하는 행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투사projection기제다. 자기 관념 혹은 감정을 특정 요소에 주입하여 스스로의 내면에는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이 일종의 정신적 습관은 특히 경쟁 관계에서 또한 많이 발견된다.
패배 후 분노하는 어떤 아이들은 다음 경기에서 이기는 것만 바라는 게 아니다. 패배한 상대방이 자기 자신처럼 분노하기를 바란다. 자기처럼 억울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자기가 느꼈던 억울한 분노를 발견했을 때에야 자기 분노가 거두어진다. 그래서 다수의 경쟁은, 억울한 패배감을 중간에 두고 이루어진다. 누가 그 감정을 느낄 것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토록 투사를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 그 감정의 처음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저 부정적 감정을 상대에게 떠넘겨 버리고자 애쓰는 아비규환만이 소위 (선의의) '경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경쟁이 당사자들을 얼마나 몰두하게 하는지 살피자면, 그 결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회가 돌아가는지, 그래서 사회가 얼마나 저런 '경쟁'을 쉽사리 충동질하곤 하는지 살펴보면 될 일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듯, 우리는 온갖 인격이나 관념, 감정을 사물에게 투사하기도 한다. 갖은 죄책감을 투사하여 무덤에서 불러낸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그게 고착화된 관례가 되는 양. 그리하여 실상 온갖 사물들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 '상상'하는 양. 그러므로 현실을 초과하는 신화들이 '상상도 못 한' 기제를 가지고 있기보다야, 유년기 발달 과정의 과정적 단계에 있는 투사 기제를 기초로 '상상'되고 있다고 간주해야 하지 않겠나. 이 신화의 정점은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맺음된다. 인격이나 관념, 감정을 다른 데 투사하는 게 아니라, 이제 원하는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역투사(내사)하는 이 기제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평판)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결과로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예로, 노력이라는 관념, 아니 실상 관념이 되기도 전에 '노력'을 추동질하는 '불편한 느낌'은 당 노력을 통한 성취와 분리되어 투사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성취한 이미지'를 자기 자신에게 역투사(내사)하여 자기 미래 자아상에 붙여 '상상'하지만, 그 과정적 '노력'은 부정적 이미지로 변경될 뿐만 아니라 이를 당 성취에 따르는 '당연한' 과정이 아닌, 배후 누군가가 의도한 '시련', 그러니까 더 긍정적인 무언가를 준비한 누군가의 '배려'라고 간주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노력'은 도처에서 영영 그를 괴롭힐 테니까(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당연히'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불확실한 모든 위험 또한 유사하게 동작한다. 재난이라는 확률상의 위험이나, 사업의 실패나 우연하고도 개인적인 삶의 실패라는 사건을 운명 배후 누군가의 의도로 간주하게 되는 '투사' 기제는 그렇게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배후 누군가'는 그렇게 투사된 인격, 그러니까 혼령이나 정령, 신 등으로 둔갑하여, 우리에게 거꾸로 이들과의 유대관계를 위한 형식(이를테면 기우제 등의 제사)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게 투사된 가상의 인격을 통해 저 모든 불행이 특이한 종류의 '인과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셈이다. 그렇게 투사하지 않고서는, 그러니까 무지의 상태로 있을 수는 없는 까닭에 만들어 낸 환상(상상)이 예의 신화라면, 이 또한 희미하게나마 지성의 힘을 빌린 열매일 수도 있으리라.
이렇게 탄생한 무수한 신화의 공통점은, 이를 투사하고 역투사하는 주체인 당사자를 '주인공' 삼는다는 점이며, 그게 이러한 신화들이 곧장 온갖 통과제의의 우화들과 결을 같이하는 원인이다.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뛰어넘어 소위 '성장(따라서 성장이라는 이 단어도 충분히 추상적이고 신화적으로 도처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을 이룩해 가는 우화들을 무수한 문화권에서 발견할 수 있듯, 같은 요소를 우리는 무수한 만화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아이는 자기 거울상을 도처에서 거듭 다시 발견한다. 이 연약한 자아상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외부 환경이나 다른 대상에 투사하는 동시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자기 자신에게 역투사(내사)하면서야 겨우 지탱되는데, 그러한 아이의 천진난만한 태도는 투사된 거울 너머의 자아상에 대한 동일시 내지 동경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투명한 거울 너머, 동경하던 소위 '주인공'의 이미지는 해당 문화권 내에 유사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경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연극뿐 아니라 소꿉놀이에서조차 다수의 배우가 원하는 배역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던가 말이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틀에 박히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를 꿈꾸는 태도를 모두가 지향하여, 어떤 예측 범위 내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다 같이 혐오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다르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획일성이 관찰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위 세계를 선과 악으로 쉬이 구별(투사-내사)해 버리는 유아기 소꿉놀이의 주인공은, 이제 모든 장소에서 의도(신)를 발견한다. 시계 침이 그를 겨누곤 알람 소리가 그를 재차 비난하기도 하고, 성적표가 그 자체로 그를 칭찬하기도 하는바. 그는 자기도 몰래 온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중이며, 어느 장소에서 세인들이 그를 주목하지 않으면 아직 배후 누군가의 의도가 빛을 비추기 전이라는 신앙을 여태 포기하지 않은 셈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그는 언젠가 스스로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인기'를 기준으로 피드백 받든, 혹 '인정'을 기준으로 피드백 받든 간에, 그는 그가 설정한 자기 '거울상'에 스스로 동일시하는 동시에, 바로 그 '거울상'을 끊임없이 구축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 범신론적 세계의 사실상 유일신은 그 자신이므로, 그는 가상의 죄책감 외의 죄책감은 느끼지 못한다. 역지사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건 지능 때문이 아니라, 모든 행동이 옳아야 하는 '주인공'에 대한 동일시가 근본적으로 죄책감을 거부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의로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만이 죄책감과 유사한, 그러므로 '스스로 성숙을 자인하는 이미지'만이 마치 죄책감을 느끼는 양 연극하도록 추동질한다. 그러나, 그가 실로 죄책감에 도달하려면 그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에 두어야만 한다. 실상의 역지사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선민의식이 포기되는 바 없인 불가능한 까닭이다. 스스로 남과 같은 위계에 두질 않는데 타인과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 생각하는 게 가능할 리 없으므로. 고로 투사 기제에 속해있는 개인이 역지사지를 흉내 내는 건,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는 양 연극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아상이 붕괴될 위험에 처할 적뿐이다. 그리하여 그 시절 그는 모든 세계 모든 것들이 그를 응시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겠다. 더 정확히는, 그 모든 것들 등 뒤에 있는 배후 누군가의 궁극적인 의도가 오로지 그를 주시한다고 '상상'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따라서 그는 언제나 사실관계보다는 '의도'를 따질 텐데. 이를테면, 어떤 논의를 할 적에 상대 주장의 모순점을 찾는 게 아니라 가상의 '의도'를 설정하여 감정을 가정하고는 이를 비난하는 식으로 언변을 펼칠 수도 있을 터다. '~를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비난에서 당 논리 그 자체의 모순이 전혀 발견되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가정된 '의도' 덕분에 비난해야 한다는 식의 논조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얼마나 많이 목도했던가. '정확성'에는 눈을 가린 채 오로지 스스로 설정한 가상의 '정당성'만으로 모든 사태를 살피는, 그러므로 4+4=8이라는 자명한 관념적 진리조차 그 의도를 추적하여 감정을 설정하곤 비난하기에 이르다 격화된 응석받이들의 다툼을 우리는 얼만치나 (우리 자신에게서조차) 많이 목격하였나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관례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아버지를 극복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양으로 스스로 우리네 '거울상'을 내려놓아야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의 인간이 아니라는 걸, 우리 자신이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고자 했던 그 어떤 상징적인 '아버지'도 결코 아니고, 이를테면 '이상적인 민주주의자'도 아니며, '이상적인 그 어떤 인격'도 아닌 동시에 영원히 그리될 수도 없는 채, 그러나 그 와중에 거기 도달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영영 '노력'하기만 해야 한다는 걸 청소년기에 깨닫게 되었을 터다. 저 모든 우연이, 배후 누군가가 우리 성장을 위해 안배해 둔 배려가 아니라 그저 기계적이고 확률적인 사태에 불과하다는 걸, 그러니까 사태를 있는 그대로 살피려면 '정당성'이 아니라 '정확성'을 기준 삼아 분석해야 한다는 걸, 사실관계는 명분이나 도덕과 전혀 관련 없다는 걸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이미 알게 되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