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 소위 '선전'되는 행복은 예의 거울상과 어떻게 관련 맺고 있는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는, 그처럼 꿈을 가져야 한다는 '선전' 문구들이 자꾸 주입하는 건 그게 사회든 개인이든 그들이 이미 지나온 과거가 아닌가? 그렇게 언젠가 마주친 행복했던 장면들에 의존하여 미래를 짜깁기한다면 그건 그저 하나의 이미지, 당 장면을 구성하고 있던 실제 삶과 관련 없을지도 모를 연출된 이미지를 이리저리 기워 흔하게 발견되는 우리네 거울상에 불과할 터다. 그리 실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끝내 사회가 새롭다는 선전 아래 사실상 동어반복적으로 주입하는 가치들, 소위 행복이라는 선전의 재료가 되는 이 낡은 요소들이 무수하게 획일적인 거울상들을 만들라고 어찌나 강요하고 있는 모양인지. 그렇게 개개의 거울상을 기성의 사회나 과거가 설명할 수 있는 틀 속에 포박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조언을 건네는 '선전'과 '충고'들은 과연 어떤 불안에 기인하는가? 말하자면, 각각의 온갖 '미래'는, 알 수 없게 다층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테니.
그리하여, 저기 저 불안을 직시할 수 없을 시 덧입게 되는 건 가짜 욕망일 모양이다. 그는 불안하기 때문에 행동한다고 '증언'하지 않고, 저 행동을 상상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행동한다고 '주장'하리라. 기성의 가치를 획일적으로 주입하는 선전이 확대하는 불안 또한 그와 같이 욕망을 가장하여 등장하고 있을 테고. 그러므로 스스로 행복을 욕망한다고 '주장'하기보다 남 '보다' 행복하지 못할까 불안하다고 '증언'하는 게 도리어 자기 '불안'에 보다 직면하는 셈일 터다. 그러나 우리가 기성이 주입하는 가치, 저 획일적인 행복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심지어 주입하는 저 충고 행위를 폭로하건 하지 않건 상관 없이 우리 모두는 이미 저 '선전'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와중에 태어나 자라는 중이겠다.
그렇다면 남들'만큼' 잘 살고 싶다는 저 획일적인 거울상 아래 남들 '보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실상 감추어져 있다 주장하더라도, 실상 더욱 아래에는 기성 사회가 선전하여 주입한 '행복'이라는 기치가 거꾸로 자극하여 번진 '불안'이 (어쩌면 자기도 몰래) 감추어져 있으리라.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잘 사는 대열'에, 저 경쟁의 장에, 그러므로 가령 주목받을 수 없는 식이든지 어쨌든지 저기 저 경쟁의 대열에 끼지 못하면 자기애(거울상-나르시시즘)가 손상당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분리)불안'이 그것이다. 또한 이런 불안이야말로 저기 저 '잘 사는' 행복에 대한 시장의 선전 문구들을 삼키고 성장하여 다시 전염되는 방식으로 시장을 온통 작동시키고 있지 않나.
따라서 자기 욕망이 그저 불안의 껍데기라는 은연중의 인식 위에서 그가, 자기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를 보고 자기 욕망이 그저 불안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폭로당할까 이중으로 불안을 겪을 적에, 도리어 해당 얄팍한 자기 욕망을 사회적 진리의 자리에 습관적으로 위치시켜 이를 전제로 타인에게 '충고'를 시도하게 되는 뻔뻔한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과장된 확신의 실태 위에서 실상 이 무수하게 양산된 충고들은, 타인(청자)을 매개로 하지만 사실상 그들(화자)이 그들 자신에게 거듭 강조하는 최면(환각)이자, 스스로 가진 은연중의 불안을 망각하기 위하여 이를 덮어둔 껍데기로서의 욕망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불안을 잊고자 하는 자기충족적 주문에 지나지 않는다.
확신이 과장되면 될수록 그는 밑바닥 자기 불안을 그만치 떨쳐내고 싶은 셈이리라. 증상이 깊이 진행되어 뿌리 깊이 자리 잡았을수록 더 확신에 가득 찬 저 확고한 태도가, 심지어 그럴수록 더욱 '성숙'한 양 가장하려는 병리적인 태도가 외부에 연출되고 있을 모양이다. 무의식의 불안을 회피하지 않는 보호자(사회)는 피보호자(개인)에게 '굳이' 필요 이상의 충고(선전)를 '가학적으로' 시도할 까닭이 없으니.
가령 성숙은 허례허식이나 태도 따위가 아니라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살피느냐에 달려있으나(설령 그게 관념적 '현실'일지라도, 정서발달의 단계는 '현실 인식'의 정도와 관련 있으므로), 종종 이 성숙을 가장하기 위하여 비대한 거울상(자기애), 흔들리지 않는 확신(카리스마)을 (스스로에게조차) 연출하기도 하는 건, 이 성숙이 언어적으로든 비언어적으로든 저기 저런 사회적 '충고'를 '가학적으로' 시도하기 위한 (얄팍한) 권위가 되곤 하는 까닭 아니던가. 실상 자신의 취약한 거울상을 지푸라기처럼 움켜쥐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그 종류가 다른 행복(가치)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굳이' 성숙을 연출한 확신에 차서, 평등이나 정의 등 온갖 고상한 가치를 매개로 미리 합리화해 둔 문장들을 통해서든 뭐든, 어쨌거나 저리 '충고'하고자 반사(동물)적으로 얼마나 애쓰곤 하는지. 그러므로 그렇게 '충고'하고 싶은 욕망은 그 순간 그저 '자기애(거울상)'에 관한 '생존 욕구'로 퇴보해 맞닿는다. 그리하여 종종 보호자의 저 '충고'하고 싶도록 후퇴한 '생존 욕구'는 피보호자의 '생존' 그 자체를 하염없이 위협하곤 한다.
따라서 행복을 매개로 한 확신에 가득 찬 충고(선전)들은, 그 자신(선전하는 사회)이 저 불행한 불안을 잊고 도피하고자 애쓴다는 걸 증거하며 온갖 타인에게 돌봄을 강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기 신앙을 진리(카리스마)로 간주하여 타인을 끌어들이고자 그리 애쓰는, 따라서 자기 종교를 타인에게 '전도하는' 어느 종교인의 근본적 '불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