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 Jul 07. 2024

가치 명료성

_

저자의 말마따나 모든 게임이 가치 명료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승패와 아주 상관이 없거나, 그저 웃기 위한 게임도 있는 까닭이다. 물론, 그와 상관없이 ‘가치 명료성’은 종종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너무 성과에만 치중한 업무수행 방식이 유발하는 어떤 ‘불친절’처럼.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우리는 그토록 자주 모호한 가치를 우회하기도 해야 한다. 명료하지 않은 상황을 ‘굳이’ 명료하게 만드느라 감수하게 되는 비용들을 무수하게 목도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이 ‘가치 명료성’에 의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온갖 문학, 영화, 회화 등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데서도, 끝내 이 감상을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기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기실 예의 ‘작품’들도 무언가(감동이나 재미, 의미 등)를 전달하기 위한 ‘기호’ 역할을 하는 셈이고). 그리고 여기서의 기호는 명료하지 않은 ‘경험’이나 ‘관념’을 얼마간 명료하게 만드는 일종의 약속이다. 우리는 꼭 ‘언어’가 아닌 그림이나 이미지, 소리나 리듬을 통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명료화를 시도한다.

가령 ‘착하다’라는 기호의 ‘모호한’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물론, 명료하지 못한 모호한 상태 그대로의 기호인 ‘착하다’로 개별 상황마다 방치되어 적용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친절하다’라거나 ‘다정하다’라거나 ‘배려가 많다’는 등의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기호로 때마다 대체될 수도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가치 명료성은 보다 고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 모호하고 복합적인 상황에서도 이를 명료하게 만들고자 시도하다 보면, 처음에는 그저 단순하기만 할 뿐 유효하지는 못한 무수한 과잉 명료화를 목도할 수도 있다. 허나 이는 보다 정확해지고 명료해지기 위한 시행착오가 아니던가. 누구도 단숨에 천 리 길을 갈 수는 없을 모양이니. 일단 한 걸음의 명료성을 위해 걸음마를 시도해야 하지 않나.

하나의 모호한 의미를 여러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들의 ‘관계’로 번역해 내는 것은 ‘가치 명료성’을 고도화하는 일이지만 ‘단순화’는 아니니까. 말하자면, 이는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한 작업인 셈이다. 게임의 행위성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우리는 공을 던진다는 낱개의 행위가 가지는 모호한 맥락을 여러 상황에 따라 분리해서 습득할 수 있다. 야구공을 던지는 투수의 행위, 농구공을 패스하는 행위, 농구에서의 슛 동작으로써의 공을 던지는 행위 등.

그와 같이, 일종의 고정관념을 마주할 적에도 덮어놓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자꾸 자기 최면을 걸면서 예의 고정 관념을 잊고자 하기보다야, 해당 고정 관념이 적용되지 않는 세부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고정되어 있던 관념이 유연하게 고도화되면서 예의 고정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지 않겠나.

가령 우리는 모호했던 우리 감정을 글로 쓰면서 보다 명료하고 대처 가능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모호한 자기 자신이라는 ‘경험’을 기호라는 ‘인터페이스’로 구분하여 분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그에 비롯한 여러 (관념의) 고도화들이 그러하듯, 우리 행위성의 라이브러리에도 하나의 동일한 행위(공을 던지다 등)일지언정 각기 다른 맥락(농구, 야구)의 ‘행위성(맥락)’들이 별도의 ‘인터페이스’로서 등록되어 있을 양이다.
_

이전 02화 게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