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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08. 2024

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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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게임에서의 미끼와 같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의 목표는 설령 좀 추상적일지언정 명료하다. 그건 ‘애도’나 ‘위로’, 혹은 ‘축하’가 될 수 있다. 게임이 아닌, 그러나 목표가 명료하기는 한 이 예식들(결혼식이나 장례식)은 게임만큼이나 행위성의 효율을 지향하며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예절을 그 행위성으로 등록한다. 우리 예절의 라이브러리엔 아마 무수한 행위성이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예절과 유사한 행위성을 우리네 라이브러리에서 찾자면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일 수도 있을 양이다.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아이스 브레이킹으로써 ‘날씨가 참 좋죠?’ 혹은 ‘비가 오는 군요.’ 등의 대사와 ‘무해한’ 표정은, 게임만큼 효율적인 뭔가를 기대할 순 없더라도, 침묵을 깬다는 일회성 목적에는 종종 부합한다.

게임에 ‘설정’이 주어진다면, 현실에는 ‘상황’이 주어진다. 게임에 이입한다면 현실에도 이입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게임에의 이입에 실패할 수 있다면, 현실에의 이입에도 실패할 수 있다. 너무 지루한 게임이라는 단순한 사례에 응하자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이입’에 실패할 수 있듯. 그러고 보면 이입의 대상은 오직 ‘가상’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은 셈이다.

우리는 소설에 ‘이입’한다. 영화에 ‘이입’한다. 게임에 ‘이입’한다. 자기 자신의 현실에 ‘이입’한다. 초점은 ‘이입’으로 인해 등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입(동일시)으로 인해 자리 잡는 ‘행위자’다. 우리는 소설 속 여느 행위자와 동일시하고, 영화 속 여느 행위자와 동일시하며, 게임의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면서, 현실에 속한 자기 자신에 동일시한다. 한편, 나머지 매체에 대해 그러하듯, 우리는 현실에 속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괴리시킬 수도 있다. 때때로 이는 유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큰 결정을 앞두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에 집중을 조금 한다든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앞에서 한동안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려 둔다든지. 행위성으로 치자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괴리시키는 행위성 또한 소위 ‘스트레스 관리 능력’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우리네 라이브러리에 얼마간 등록되어 준비될 수 있는 레퍼런스일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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