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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09. 2024

수동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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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입(동일시)을 통한 행위성은 ‘학습’되기도 하듯 ‘주입’되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친 만화 영화의 주인공들은 종종 관객을 매혹한다. 아이들은 매혹된다. 말하자면 행위성이 ‘주입’된다. 그들은 이입‘하는’ 게 아니라 이입‘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의 환상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고 머릿속으로 이입(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몽상 속에서 ‘악’을 물리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만화 영화의 주인공에 이입된 모습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 칭찬받는 모습의 가상의 혹은 현실의 학우에게 ‘이입’될 수도 있다.

여기서, 이입을 통한 목표는 명료한가? 종종 명료하다. 악을 물리친 영웅의 ‘영광’이나, 한 가닥 선생님의 칭찬이나 뭐 그런 것들. 그러나, 거기 이입되고 있는 아이가 정작 매료된 건 그런 목표가 아닐 수 있다. 여기서의 미끼는 영웅의 영광이나 선생님의 칭찬이라기보다, 그 과정에 있을 수 있으니. 미끼는 선생님의 ‘칭찬’ 자체가 아니라 ‘칭찬을 받는 자기 모습’이라는 이미지일 양이다.

동일시(이입) 가능한 이미지는, 당사자가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역할’을 역할의 일회성 목표와 함께 미끼로 던진다. 아이는 언젠가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 동안에도, 이전에 구현해 두었던 환상을 재생(이입)할 수 있다. 칭찬받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꾸중이라는 상황에 ‘이입’하기 보다 칭찬 받는 자기 모습에 ‘이입’되고자 하면서, 꾸중 받는 현실에서 정신적으로 도망치기도 한다.

무수한 ‘역할’에의 ‘이미지’에 매료‘된’ 아이는 그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동일시(이입)되며 해당 행위성을 자기 라이브러리에 등록하게 된 셈이다. 그는 자꾸 매료된 역할을 수행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동일시)하며, 현재 능동적으로 행동(이입)해야 할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게임에 이입‘되는’ 것도, 행위성을 학습하겠다는 목적이라기보다 게임 속 익스트림한 상황에 머물러 있는 가상의 등장인물들에 매혹(이입)되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영웅이든, 정치적으로 뛰어난 수완가든, 기민한 혁명가나 능수능란한 여우나 고상한 귀족 등의 인물들처럼.

나아가, 무수한 광고는 제품의 성능을 연출하기보다는,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동일시 가능한 이미지를 연출하곤 한다. 유려한 연예인들이 나와서 기꺼이 해당 제품의 소비자가 되는 광경은,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이입하기보다 수동적으로 이입되도록 값비싼 레드 카펫을 거듭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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