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구매 시 가장 우려되는 건 화재입니다. 내연기관차에서 발생하는 화재와 달리 배터리 자체가 밀폐 구조이고 에너지 밀도가 매우 높아, 사실상 끄기 어렵습니다.
배터리 화재는 배터리 안에 있는 양극과 음극을 나눠 놓은 분리막의 손상으로 발생합니다. 분리막이 여러 이유로 찢어지거나 불량이면 양극과 음극이 직접 맞닿게 되는데, 이 때 급격한 화학반응이 발생해 뜨거워지게 됩니다. 이때 매우 뜨거워진 배터리에 연쇄 반응이 일어나 화재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열폭주’현상이라 이야기하죠.
그래서 과학자들은 에너지 밀도를 높여 주행거리를 늘리는 것 외에도 화재로부터 자유로운 배터리를 만드는 데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직 연구실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고밀도, 낮은 화재 위험을 만족하는 건 ‘전고체 배터리’입니다. 전해질이 고체로 안정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완벽히 개발되지 않았고,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가 많아 2040년에서 2050년 사이 상용화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전고체 배터리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의 배터리 개발로 선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류가 아주 다양하지만, 이번 내용에선 ‘바나듐 이온 배터리(VIB)’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실사용 테스트 단계에 접어들 만큼 개발 진척이 많이 이루어진 배터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나듐 성분은 무엇인지,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무엇인지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바나듐은 200년 전 스페인에서 처음 발견된 후 여러 산업에서 폭넓게 활용하는 성분입니다. 자동차 산업에선 100여 년 전부터 사용했는데, 철에 탄소와 바나듐을 섞은 ‘바나듐강’이 대세였습니다. 당시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 사용하던 합금보다 3배 정도 ‘인장강도(당겼을 때 버티는 힘)’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나듐은 연성(늘어나는 성질)과 전성(얇게 펴지는 성질)이 우수한데 잘 부러지지 않고 무른 성질까지 갖고 있어 차량용 부품으로 가공하기 안성 맞춤이었죠.
그밖에 내마모성이 강해 공구, 스프링, 제트엔진 등 여러 물건을 제작하는데도 활용됐습니다.
한편 바나듐은 의외로 섭취하면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콜레스테롤 생산을 조절해, 동맥경화를 예방하며 인슐린을 흉내내 당뇨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죠. 그밖에 자연에선 독 형태로 존재하는 의외로 활용도가 높은 성분입니다.
주로 제조업에서 사용되던 바나듐은 최근 배터리 소재로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높은 효율, 안정성, 긴 수명이 장점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듐 배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RFB)’
‘바나듐 이온 배터리(VIB)’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는 전자의 통로가 되는 전해액 성분에 바나듐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널리 사용되는 리튬이온 배터리와 비슷하게 화학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2차 전지로 분류되죠. 이 배터리는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덜 유해하고, 화학 반응성이나 화재 위험이 낮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수명도 20년 이상 사용할 만큼 길고 전해액을 교환해 주면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충전과 방전이 자주 발생하고, 최대한 안정적이어야 하는 환경에 사용합니다. 대표적으로 발전소 내 전력저장장치(ESS)에 활용되죠. 하지만 안전한 만큼 단점도 있습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적어도 90% 이상의 충방전 효율을 보이는 반면, 이 전지는 70% 수준으로 낮은 편이죠.
또, 에너지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보니 별도의 바나듐 전해액 탱크를 설치해서 순환시켜야 합니다. 쉽게 말해 설치 공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심지어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비싸 이를 해결해야 보편화될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리튬을 사용하지 않은 배터리, 즉 ‘비리튬계 배터리’를 사용하는 프로젝트가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를 절반 이상 채택했고, 일본은 풍력과 같이 전력 공급량이 일정하지 않은 친환경 발전 시스템에 이 전지를 사용한 ESS를 발주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 2020년 규제 샌드박스 형태로 ‘비리튬계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죠. 또, 울산에 실증설비를 설치해, 상업운전을 개시한 바 있습니다. 특히 작년 초, 이 배터리 가격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바나듐 전해액을 반값으로 대량 양산하는 기술이 국내에서 개발돼, 글로벌 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의 단점을 개선한,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카이스트와 미국 MIT 연구진이 세운 기업인 ‘스탠다드에너지’에서 7년 만에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입니다. 이 기업의 대표는 카이스트 출신으로 원래 로봇 개발자가 꿈이었지만, 로봇성능을 높이려면 배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분야로 진로를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존 배터리는 활용성과 효율성 두 가지가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됐는데,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이를 해결해,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배터리 역시 리튬이온배터리와 구조가 비슷합니다. 전극이 존재하고, 바나듐을 갈아서 물에 넣은 전해액과 별도의 분리막이 있습니다. 하지만 배터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배터리를 감싸는 전극소재가 전해액을 붙잡아 외부 유출 걱정이 없습니다. 또, 기본적으로 전해액 자체가 물이기 때문에 폭발 위험 역시 없습니다. 실제로 드릴로 뚫는 시험을 진행해도 멀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내부 소재인 분리막과 구조체 카페에서 사용 후 버리는 1회용 폐 플라스틱을 사용해 환경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배터리 수명이 다 하면, 재활용이 가능하며 리튬 이온 배터리 대비 제조 시간이 10분의 1수준밖에 안돼 경제성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배터리는 기존의 리튬이온배터리와 맞먹거나 오히려 높은 효율을 자랑하는데, 무려 96%에 달합니다. 기존 리튬이온배터리의 효율이 최대 90% 중반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혹 조건에서 8천 번 이상 충방전을 거쳐도 성능에 변화가 거의 없어, 시간 상 10년 이상의 내구성을 갖췄습니다. 그렇다면 성능은 어떨까요?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리튬이온배터리의 2배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기존 배터리 대비 약간 더 무겁고 부피가 커, 전기차용으로는 좀 더 기술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기에너지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대형 선박 동력 시스템이나 발전소 ESS, 급속충전기 등에는 이미 활용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아이오닉 5에 바나듐 이온 배터리로 만든 급속 충전기를 꽂아 충전하는 실험을 거친 바 있고, 롯데케미칼, 한국조선해양 등과 협업으로 기술 실증을 거치는 중입니다.
스탠다드에너지에 따르면,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처음부터 움직이는 것에 탑재하는 걸 고려해 개발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추후 소형화와 에너지 밀도 개선으로 전기차 탑재 가능성에 대해 여지를 남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소재들 중 바나듐에 주목한 이유는 뭘 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생각보다 흔하고 공급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리튬과 비교했을 때 바나듐의 가격이 더 저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원자재 급등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영향)
사실 바나듐은 리튬과 함께 배터리 시장을 양분할 것으로 주목받던 고부가가치 광물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남아공 등지에서 수천 톤가량을 전량 수입해 왔습니다. 하지만 도처에 널린 흔한 화물이다 보니, 국내 채광에 대한 기대도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경기도 포천의 티타늄 광산에서 나오는 티타늄 원석엔 바나듐이 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미국산보다 함유량이 높은 편이어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광물을 선별하고 활용하는 기술력이 부족해 그동안 별도 가공 과정 없이 중국에 판매중이었습니다. 정부는 2018년부터 새로운 활용가치에 주목해 국내 매장량 지도를 제작 중이며, 채광 및 정제 기술을 개발 중입니다.
흔한 자원으로 최고 성능과 긴 수명이 보장되는 배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배터리 제조 기술이 보편화되고 더 업그레이드되어, 전기차 가격이 크게 줄었으면 합니다.
"전기차에 넣으면 대박" 불 안나는 진짜 배터리 등장
글 / 다키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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