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차인데 주행거리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는 450km라 하고 다른 사람은 500km라고 하죠. 특히 전기차가 더 심해요. 400km 이상이라고 보도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300km 초중반이어서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이러면 다들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약 파는 거야?”라고 말이죠.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자동차를 개발할 때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주행거리 인증이죠. 이게 없으면 팔지도 못해요. 우리나라에서 자주 나오는 주행거리 기준을 보면 유럽 · 미국 · 우리나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럽은 ‘NEDC’와 ‘WLTP’ 두 가지가 있고 미국은 EPA, 우리나라는 환경부와 산업부 인증이 있어요.
우선 NEDC를 알아보겠습니다. NEDC는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자동차 연비 측정 방식입니다. New European Driving Cycle의 약자인데, 1980년대에 유럽에서 처음 시작된 후 나중에 국제 기준으로도 활용됐어요.
측정은 유럽 내 도심과 외곽 도로를 기준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데, 크게 ECE와 EUDC 두 가지를 테스트합니다.
ECE는 파리와 로마 같은 복잡한 시가지 주행을 가정한 테스트 기준입니다. 저속 주행이 기본이고 엔진 부하를 낮게 가져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EUDC는 고속 주행 테스트로 보시면 됩니다. 원래는 내연기관차 전용으로 개발된 기준이지만 나중엔 전기차 같은 친환경차의 전비와 주행거리를 테스트하는데도 사용됐어요.
주요 특징으로는 유럽 차들이 대체로 가볍고 출력도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테스트 기준도 완만한 가속과 정속 주행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차를 두고 측정하더라도 가장 긴 주행거리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전 중 발생하는 여러 상황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 정확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제기돼서 2017년부터 NEDC 대신 새로운 기준인 WLTP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럼 WLTP란 무엇일까요? WLTP는 Worldwide Harmonized Light-duty vehicle Test Procedure의 약자입니다. 말이 좀 긴데, 의역하면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측정 방식이라는 뜻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볼보나 폭스바겐 같은 유럽 브랜드를 보면 WLTP 기준을 사용해요. 가끔 NEDC도 같이 표기하고요. 이 방식이 NEDC와 다른 건, 보다 현실적이라는 거예요. 측정거리가 두 배 정도 늘었고, 주행 시 평균속도도 더 빨라졌습니다.
또, 고속 주행의 경우 기존엔 최대 속도가 시속 120km였는데, 변경 후에는 시속 130km가 됐죠. 그밖에 다양한 주행 환경을 가정한 새로운 기준이 추가됐습니다. 이렇다 보니 전기차 주행거리를 측정하면 NEDC 기준보다 짧았습니다.
구형 코나 일렉트릭을 기준으로 NEDC 기준으로는 무려 546km나 되지만 WLTP로 하면 482km로 확 줄어들죠. 64km나 줄어든 건데, 그래도 뭔가 우리가 알던 주행거리인 406km보다 많이 차이나죠? 이유는 뒤에서 다뤄보겠습니다.
어쨌든 유럽의 WLTP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자체 기준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EPA죠.
EPA는 미국환경보호청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환경부에 해당되는 부처에서 내주는 주행거리 인증 정도가 되겠습니다.
측정 방식을 보면 전기차 배터리를 완전히 충전시킨 다음 밤새 주차를 한 뒤에 주행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이 테스트는 MCT, Multi-Cycle Test라 부르는데,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될 때까지 UDDS와 HWFET 두 가지를 테스트합니다.
UDDS는 시내 주행 테스트로 보시면 됩니다. 뉴욕과 LA 지역의 시내 주행 패턴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테스트죠. 최대 시속 90km로 달리며 중간에 수십 번 멈추는 것을 반복합니다. 신호 대기나 길이 막히는 상황을 가정한 거죠.
또, HWFET는 고속 주행 테스트입니다. 정차 없이 대략 시속 50km에서 시속 100km 사이로 주행하며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두 테스트를 통해 얻어진 주행거리 값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도심과 고속 테스트의 평균 값을 5.5 대 4.5비율로 나누고 마지막에 이 값의 70%만 사용한다는 겁니다.
외부 온도에 따른 배터리 상태나 에어컨, 히터 같은 공조 기능을 이용하며 이동하면 배터리가 더 빨리 소모된다는 이유 때문이죠. 그래서 기아차 EV6를 기준으로 보면 후륜 롱 레인지 모델의 주행거리는 WLTP 기준 528km, EPA 기준 499km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 환경부 인증은 어떨까요? 유럽과 미국 기준들 보다 더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죠.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미국 EPA 기준을 따릅니다. 하지만 추가로 5-cycle testing procedure이 추가됩니다. 이 방식은 도심 주행 모드인 FTP-75와 고속도로 주행모드인 HWFET에 추가로 몇 가지 상황이 더 추가됩니다.
대표적으로 고속주행, 급가속, 급감속 모드인 US06 모드, 에어컨을 켜고 주행하는 SC03 모드, 겨울같이 추울 때 도심 주행을 가정한 콜드 FTP-75모드가 포함됩니다.
이렇다 보니 주행거리가 가장 짧게 나온다는 EPA보다 더 적게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유럽에선 400km 대 주행거리를 자랑하는 차들도 우리나라에만 오면 300km 초반이나 200km 대 후반을 기록하죠.
자, 그런데 우리나라 환경부 기준에 대해 일부는 산업부 기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아이오닉 5와 EV6 같은 최신 전기차는 환경부가 아니라 산업부 기준을 내세웁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과태료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조사들이 자기인증 제도를 통해 제출한 측정값을 바탕으로, 전비 측정에 대한 사후관리가 진행됩니다. 이때 산업부에 보고한 수치와 차이가 크면 과태료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조사들이 이 문제를 고려해 산업부와 국토부에 제출하는 자료는 좀 더 보수적으로 측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이게 가능한데, 전기차 1회 충전 주행거리에 대해 측정 결과보다 낮게 보고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산업부 기준이 좀 더 보수적이기 때문에 제조사들 역시 환경부가 아닌 산업부를 기준으로 전기차 주행거리를 공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더 까다롭게 측정하거든요.
자, 오늘은 전기차 주행거리 기준에 대해 간단히 알아봤습니다. 나라 별로 전기차 주행거리 차이가 발생하는 건 각 나라의 사정에 맞는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사람 사는 곳이기는 하지만 날씨, 도로 상태 같은 여러 변수에서 차이를 보이니 말이죠.
그래서 한 번 충전으로 800km, 1000km 넘게 가는 전기차가 있다고 홍보를 하는 브랜드가 있다면, 후하게 쳐주는 유럽 기준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미국이나 우리나라 기준을 적용하면 주행거리가 짧아질 게 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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