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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성찰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

by 산들

시를 읽으며 함축된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나를 본다. 언어가 나타내는 숨은 의미와 그 시가 쓰인 배경을 모르면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인이 의도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라이너 쿤체가 마지막까지 써 내려간 ‘이젠 그가 멀리 있지 않을 것’ 시를 읽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지인들이 떠올랐다.


갓 요가에 입문하면서 알게 된 요가 선생님.. 항상 긴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쪽을 지어 단아한 동양미가 풍기는 분이었고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따뜻함이 묻어났다. 도시 변두리에서 농사도 지으시고 주말농장도 운영하셔서 나는 가끔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과 그곳에서 농사 체험도 했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시는 모습이 부러웠고 자연을 닮은 순수한 마음을 배울 수 있는 분이었다. 함께 요가 행사도 참여하면서 조금씩 정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아이들도 크고 나도 프리랜스 강사로 바빠지면서 연락이 뜸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을 통해 그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삼일장이 지난 뒤였다. 주변 지인들은 서로 연락을 취해 장례식장에 이미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에게는 부고 소식을 알리지 않은 주변 지인들에 대한 원망과 무심해서 안부를 묻지 못했던 미안함과 그분을 다시 볼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뒤섞여 원망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부고 소식을 전해준 지인은 내가 그분과 친밀감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는지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 생각날 때마다 슬픔에 빠졌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연락이 뜸하던 지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서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대학 동창의 자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후배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이혼을 했다는 것도, 엄마와 살다가 우울증으로 함께 동반자살 했다는 소식도 뒤늦게 전해 듣고 충격에 빠졌다. 내가 모르는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로 연락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지인들의 죽음을 모를 것이고 내가 죽어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내가 위암 진단을 받고 자연치유를 하던 중에도 지인들의 죽음을 수도 없이 겪었다. 뇌종양으로 오랫동안 병실에 누워만 계시다 돌아가신 시어머님,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한 후 복막전이로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한 요가 도반, 유방암 수술을 받고 자연치유를 병행하다 온몸으로 전이되어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시누이, 폐암 말기로 수술도 해보지 못하고 자연 속에서 생활하다 결국 호스피스 병동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은 대학 선배도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을 겪어야 하지만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을 고비를 한번 겪었 지인들의 죽음을 여러 번 겪고 나니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 삶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병에 걸려 죽든 늙어서 죽든 사고를 당하든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순간을 편안히 맞을 수 있는가이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살아가는 것이고 저녁에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욕심을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산다면 죽을 때도 보람을 느낄 것 같다. 장례문화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죽고 나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는데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 작별 인사를 미리 나누고 죽는 날은 가족들만 참여하여 고인을 조용히 보냈으면 좋겠다.

어느 주말 아침에 밥을 먹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데 햇빛이 들어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남편은 옆에 앉아 책을 보고 있고 딸은 자기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이 스르르 감기고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겠구나. 매일의 일상이 평온하다면 죽음을 이렇게 편안하게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의 글을 읽으며 그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저녁노을과 아침노을 사이에 죽음을 예감하며 '잘들 있어'라고 미리 말하고 고목나무에게 절하고 나 대신 인사해 달라는 말에 편안함이 묻어난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의 마지막이 느껴져 겸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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