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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by 안나

빛과 그림자


`안나지에安娜姐`


제가 일하는 은행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저를 부르는 호칭이에요.

제 이름이 발음도 어렵고 길거든요. 실명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면 영어 이름인 안나로 해요. 타오바오淘宝(중국 최대 쇼핑몰, 아마존, 쿠팡과 비슷)에서 물건 시키거나 허마盒马(한국의 마켓컬리와 비슷)에서 야채를 시켜서 받을 때도 수취인 이름을 안나로 하거든요. 아주머니는 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넘치세요.


상하이로 왔을 때부터 저를 신기하게 여기세요.

아침마다 출근해서 커피 내려서 마시는 것도 신기해하시고 제가 싸 온 도시락을 보면 항상 놀라세요. 중국 분들은 생야채 잘 안 먹거든요. 생야채 위주로 도시락을 싸 오기 때문에 제가 먹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하대요. 상하이 봉쇄 기간 동안 제 걱정을 하셨대요. 봉쇄 해제 후 출근해서 만나니까 그동안 야채 공급이 잘 안 되어서 안나지에가 먹을 것 없었겠구나 생각하면서 걱정했다고 하네요.


제게 배달 오는 모든 물건과 서류는 포장과 봉투를 다 벗겨서 알맹이만 가져다주세요.

포장과 봉투가 지저분하고 뜯고 열기도 번거로우니 본인이 다 뜯어서 주세요. 제가 무엇을 사고 먹는지 다 아세요. 가끔 개인적인 물품도 있는데 다 포장을 벗겨서 주시니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아주머니의 성의에 감사드려야죠. 저를 잘 살펴주시고 많이 도와주세요. 고향에 갔다 오면 특산이라고 깨과자도 사 오시고 집에서 경단도 만들어왔다고 먹어보라고 주세요.


저희 아주머니는 장쑤성 앤청 江苏省 盐城에서 오셨어요.

호구도 취업 허가증도 없어요. 취업허가증이 없으면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낼 수 없어요. 사립이나 국제학교를 보낼 수 있지만 외지에서 일하려 온 노동자들이 그런 학교를 보내기 어렵죠. 취업 허가증이 있으면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낼 수 있지만 대도시의 호구가 없으면 집도 차도 살 수 없어요. 신분증, 혼인등기, 여권을 만들고 연장, 재발급하는 것도 호구가 있는 자기 고향 가서 해야 해요. 이 호구제가 바로 중국의 신카스트랍니다. 5년 이상 대도시에서 소득세와 사회보험료를 내면 제한적으로 집이나 차를 살 수 있어요.


1958년에 시작된 호구제는 농촌인구가 도시로 쏠리는 집중화 현상을 막으면서 중국 경제 고속성장이 가져온 번영과 풍요를 대도시 거주민들에게 편중시켰어요. 누구나 도시에 살고 싶어 해요. 호구제로 도시 간 이동을 막았고 의료, 교육, 사회 인프라는 대도시 호구를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전유물이 되었어요. 인간의 기본권인 이동과 거주의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에나 있어요.


호구제의 끝판은 입시제도예요.

대도시 호구가 없으면 자기 고향에 가서 입시를 해야 해요. 고향에서 입시하는 게 뭐가 문제냐 할 수 있어요. 누구가 가고 싶어 하는 절대명문 북경대의 입학 정원은 1년에 3,000명 정도예요. 전국 입시 학생 수는 1,200만 명 정도 되어요. 북경시 입시 학생 수 5만 명 정도예요. 500명이 북경 호구를 가진 학생들의 몫이에요.


1,200만 명 중에서 3,000명 안에 드는 게 쉬울까요?

5만 명 중에서 500명 안에 드는 게 쉬울까요?


계산기 안 눌러봐도 알 수 있어요. 대도시마다 도시 호구를 가진 입시생들의 정원이 따로 있기 때문에 도시호구를 가지고 있는 게 훨씬 유리해요. 대도시 호구에 대한 이글거리는 욕망의 불꽃은 꺼질 수 없어요.


대도시 호구를 받으려면 점수를 따야 해요.

학력, 직장 규모, 급여 수준, 근무연수로 점수를 매겨요. 고학력, 고임금의 좋은 직장을 다니는 젊은 엘리트들이 호구를 받게 되는 거죠. 저희 아주머니나 기사님, 보안 직종에서 일하는 분들이 점수로 호구를 받는 것은 어려워요. 호구를 가진 사람과 결혼을 하면 호구를 받을 수 있어요. 대도시 호구를 가졌다는 것은 결혼 시 유리한 조건이 되어요.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경제 성장과 자산 가치 상승의 풍요로움을 향유하면서 외지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저렴한 서비스를 누려요. 어느 사회든지 기득권을 떠받치는 것은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이에요. 중국에서 부의 양극화, 인구 감소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호구제를 개선하는 방침은 조금씩 나오고 있으나 그동안의 기득권을 흔들기는 어려울 거예요.


누구에게는 호구제가 기득권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빛이지만

누구에게는 넘사벽이자 세습되는 어두운 그림자랍니다.



장쑤성에서 와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나의 살던 고향`은 넘을 수 없는 호구제벽으로 둘러싸인 상하이일까요?

한달에 2,000위안( 약 40만원) 받지만 가족과 친구가 있는 정든 앤청일까요?



아파트 인류


아파트에서 태어났고 성장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아파트는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지어져요.

마당과 골목이 없는 공간에서 자란 아파트 인류에게 고향은 어떤 걸까요?

고향을 공간이 아닌 숫자로 기억하는 아파트 인류에게 고향은 몇 동 몇 호일 거예요.


한국에서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마당이 있던 단독주택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 지 오래되었어요. 어쩌다 보니 세워지는 신도시마다 세워지는 신축아파트를 따라다니면서 성장했어요. 신도시는 초창기에 늘 공사판이었죠. 기억 속 고향은 시멘트 먼지와 크레인 소음이 공존하는 공간이었어요.

제게 고향은 예전 마당이 있던 집은 이미 사라져 버린 한국일까요? 지금 사는 중국일까요?


2008년도부터 2010년까지 2년간 산동성山东省 취푸曲阜에서 한국어 강사로 살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공자의 고향이 있는 곳이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로다`로 유명한 태산이 있는 곳이에요.


취푸는 인구 12만의 작은 도시이고 한국인 10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예요.

저는 시내에서도 27Km 떨어진 작은 마을에 있는 대학교에서 살았어요. 주말마다 취푸 시내에 장 보러 갔어요.

가끔 산동성 성도인 지난济南에 가면 높은 건물과 붐비는 차량이 신기하게 느껴졌고 한국을 오가기 위해 비행기 타러 5시간 동안 가야 하는 칭다오青岛는 거대한 메트로 폴리스였어요. 취푸에서 2년을 살았어요. 어쩌다 산동성에서 살았던 분들 만나면 `어머 산동성 어디에서 사셨어요` 하고 반갑게 물어보곤 해요. 산동성 면적만 해도 한국보다 넓은데요.


2011년도부터 2021년까지 베이징北京왕징望京에서 살았어요.

베이징에 사는 교민들의 90%는 왕징에 살아요. 왕징 랜드마크는 소호 SOHO라는 건물이에요. 저는 소호 땅 팔 때부터 살았고 다왕징大望京CBD에 포스코 POSCO 건물 올라가는 것 보고 살았어요. 지금 살고 있는 상하이에는 베이징에서 살았던 분들이 많아요. 낙원슈퍼 떡볶이 이야기하고 지금은 사라진 아침시장(왕징 교민들이라면 누구나 가던 시장)과 평가시장(한국어가 통하는 재래시장)이 이제 문 닫았다는 이야기 하면서 추억을 공유해요. 얼마 전 모임에 6명이 참석했는데 그중에 5명이 북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어요.

상하이에서 베이징 향우회를 할 수 있어요.


취푸와 왕징에서 12년을 살고 2021년 12월에 상하이에 왔어요.

2022년 3월부터 5월 말까지 75일을 봉쇄된 아파트 안에서 혼자 하얀 아파트 벽을 보면서 보냈어요. 중국 집은 벽지를 바르는 게 아니라 하얀 페인트 칠을 하거든요. 봉쇄된 시간은 제게 추억의 농도를 조절했어요. 12년을 살았던 시간보다 상하이에서 보낸 시간이 더 또렷이 제게 남았어요.


제가 사는 치바오七宝는 치바오라오지에七宝老街라는 옛 수향 마을이 있어요.

후한后汉시대에 형성되었고 송나라 초에 발전했고 명, 청 시대에 전성기였다고 하네요. 약 1,000년 정도 된 오래된 마을이에요. 상하이는 내환内环과 외환外环으로 나뉘는 데 여기 외환 밖에 있어요. 1992년 전까지 여기는 상하이시가 아닌 시골이었어요. 원래 살던 원주민들도 많아 상하이 시내에서 금지된 폭죽놀이도 여기선 자연스레 해요.


저는 일요일 저녁이면 발 마사지를 받는 게 일상이에요.

현지분들이 많이 가는 로컬 마사지 가게에 자주 가요. 저를 전담으로 해주시는 분이 얼마 전에 문자를 보냈어요.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고요. 상하이 봉쇄로 장기간 문을 닫았고 봉쇄 해제 후에도 간헐적 봉쇄로 영업을 못하면서 경영이 어려워져 폐점하기로 했대요.


많이 아쉬웠어요.

그동안 정이 들었는데요. 마사지집 직원들도 저를 다 알고 손님들도 저를 알아요. 제가 마사지받고 있으면 자기네들끼리 한국여자라고 이야기하고 가끔 한국에 대한 질문도 던지고 제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해요.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상하이 사람들이 아니라 외지인이에요. 중국에도 인도 못지않은 카스트가 있어요.


한 달 정도 학원에서 훈련받으면 마사지사가 되어요. 진정한 마사지사가 되는 것은 현장에서 이뤄져요. 마사지가게에서 마사지하면서 선배들에게 배우면서 실력을 키우게 되죠.

마사지사는 일한 만큼 급여를 받아요. 비율은 실력과 경력에 따라서 다른 데 보통은 50:50 혹은 40:60이에요. 마사지집 사장들은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요. 숙소와 식사의 질은 편차가 커요. 마사지사가 고된 직업이지만 아무 자본 없이 맨몸으로 도시로 와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해요.


문 닫기 전날

마지막으로 마사지받으러 갔어요. 저는 또 다른 이별을 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치바오의 저녁노을은 컴퓨터 CG보다 예쁜데요.


언젠가 저는 중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죠.

저는 이곳을 3개월 동안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당했던 아파트 봉쇄지옥으로 기억할지, 꽃 피는 산골로 기억하지는 모르지만 나의 살던 고향은 이곳 상하이 치바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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