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뫼르소의 건조한 감정이 너무 나 같았다. 양로원을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달픔과 장례식을 치르고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뫼르소가 느끼는 현실적 갈등에 공감이 간다. 어렸을 때, 언젠가 읽었을 <이방인>을 이제 까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다시 읽게 되었다. 그때는 글자를 읽었고 지금은 까뮈의 생각을 읽는다.
흔히 구조주의 철학자, 사상가, 작가인 사르트르와 대척점에 까뮈를 세우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3월 <1984>의 조지오웰에 이이어 까뮈도 작가로서 갖춰야 할 모든 스펙은 완벽히 갖추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불우한 성장과정, 1,2차 세계 대전을 겪어야 하는 인류 근현대사를 살았고 47세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면 까뮈는 실존철학 같은 깊은 사고를 하지도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방인은 까뮈가 그렸던 실존과 부조리 중 시작 부분 소설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 , 중요시하는 것, 절차, 의무에 대해 까뮈는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실을 다르지 않다. 사는 것은 우리인데,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가는 곳, 타는 것 같은 물질로 평가하고 평가받고 SNS로 삶의 질과 만족을 결정한다. 내 생각과 감정이라는 자기 판단이 있지만 우리는 남의 판단에 울고 웃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까뮈는 자신의 사형식 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깨닫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실존, 그래, 있는 대로 존재하면 된다. 죄를 만들어 안겨주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