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으로 떠난 이별여행 2부

by 안나

14m 높이 ,거대한 유리벽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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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이 많다. 서로 가까이 서 있지만, 모두 각자의 시간과 공간 속에 집중한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만큼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인다.


누군가 나를 봐 달라는 듯 손을 든다. 직원이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한다

“아이폰 17 프로 맥스, 512기가. 오렌지색이요.”


중국에서도 살 수 있는 아이폰이다. 심지어 以旧换新 정책으로 보조금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홍콩까지 와서 사는 이유는 단순하다. 중국판 아이폰에는 eSIM이 없고, 무엇보다 구글 AI가 없다. 그게 없다면, 아이폰을 쓸 이유도 없다.


한국에서 사면 더 싸다. 같은 사양이 중국에서는 12,000위안(250만원), 한국에서는 229만 원이다. 한국판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난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울리는 그 소리가 불편하다. 우편으로 홍콩판 아이폰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와의 이별을 우편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이별을 하러, 굳이 홍콩까지 왔다.


상담도, 시연도 필요 없다.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직원이 카드 단말기를 들고 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먼저 돈을 내고 나서야 무언가를 얻는다. 11,900홍콩달러를 결제한다. 홍콩에는 부가가치세가 없어 돌려받을 것도 없다.케이스가 필요하냐는 직원 말에 타오바오에서 이미 사간 케이스를 내밀었다. 애플스토어에서 파는 정품케이스도 어차피 메이드인차이나다.


직원이 네모난 하얀 상자를 가져온다. 봉인 테이프를 뜯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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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 봉인을 벗기자 오렌지색 아이폰이 모습을 드러낸다. 액정 위 보호 필름도 내가 직접 떼라고 한다. 손끝이 이상하게 조심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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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인을 하겠다고 하자, 데이터 백업은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마이그레이션에는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망했다. 원래 계획은 이별하자마자 손 한 번 흔들고 돌아서는 것이었는데, 계획은 늘 감정 앞에서 무력하다.


홍콩에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떠나려 했는데, 역시 이별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너를 맡기고 매장을 나온다.


하버시티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쇼핑몰이다. 걷다 보니 바다가 나온다. 건너편에 홍콩섬이 보인다. 밤이었다면 화려했을 풍경이지만, 12월의 낮은 햇빛만 눈부시다. 상하이에서도 가지 않던 치즈케이크 팩토리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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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맛 없는 야채 수프와 토마토 스파게티. 200홍콩달러. 3만 8천 원짜리 점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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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딤섬 몇 개면 충분했을 텐데, 쓸데없는 호기심이 또 하루를 비싸게 만든다.


시티슈퍼에 들러 물가를 본다. 파프리카 하나 27홍콩달러, 딸기 열 개에 100홍콩달러. 이런 홍콩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직은 밤보다 낮이 짧은 계절이다. 겨울 햇빛은 침사추이 건물 사이로 빠르게 사라진다.


다시 애플 스토어로 돌아간다. 종이를 내밀며 휴대폰을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신분증도 요구한다. 혹시 누가 종이만 주어 폰을 찾으러 올 수 있는 리스크를 예방하는 것이 좋다. 새 폰과 너를 동시에 데리고 온다.

이제 정말 이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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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된 너를 반납한다. 직원은 외관과 내부 용량을 꼼꼼히 확인한 뒤 2,000홍콩달러를 환급해 준다. 나는 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 않았다. 네가 태어난 곳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매장을 나설 때,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이제 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룡九龙역까지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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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푸텐福田까지 가는 기차표는 매진이다.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이라는 사실을 나만 몰랐다. 1초도 더 홍콩에 머물고 싶지 않은데, 도시는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두 번 환승,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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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로 20분이면 되는 거리를…오스틴역으로 내려가 표를 사려는 순간, 현금만 가능하다는 말을 듣는다. 홍콩달러 한푼도 없다.

알리페이,위챗페이로도 승차 가능하지만 외국인은 안 된다.


역 안에 있는 중국은행 ATM에서 100홍콩달러를 뽑는다. 계좌에서는 90위안이 빠져나갔다는 알림이 온다. 다시 창구로 가 푸텐까지 가는 싱글 티켓을 달라고 하자 대뜸 75HKD 데이투어패스를 내민다. 아니 난 지금 떠나려는데 왜 데이패스를 강요하냐, 푸텐까지 가는 싱글 티켓을 달라는데도 계속 데이투어패스를 사라고 한다. 끝까지 우겨 겨우 50 HKD 주고 푸텐까지 가는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돈 다 내고 티켓 사겠다는 데 왜 데이투어패스를 강요하는 지 지금도 불쾌하다. 안 그래도 이별 후 마음이 쓰린데


퇴근길 홍콩 사람들과 함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푸텐에 도착한다. ‘离境大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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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장이라는 글자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홍콩 출국 수속을 마치고 다리를 건너 중국 국경으로 향한다. 유리벽 너머로 강물이 흐른다. 물에는 선이 없는데, 사람은 선을 긋는다.


무빙워크를 타고 걷는 몇 분이 유난히 길다. ‘CHINA IMMIGRATION’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휴대폰 기지국이 중국으로 바뀌자, 밀려 있던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수없이 떠나고 돌아왔지만, 이번만큼 중국 땅이 반가웠던 적은 없다.


외국인은 별도의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 당일 출국했다가 돌아온 나를 심사관이 잠시 바라본다. 여기서 호텔까지는 차로 가도, 지하철로 가도 한 시간이다. 낯선 곳에서 택시를 부르는 것보다 지하철이 낫다. 알리페이 QR코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한다. 세상은 이렇게까지 편해졌는데, 이별만은 여전히 어렵다.


아침 네 시 반에 시작된 홍콩으로 떠난 당일 이별 여행은 밤 여덟 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나는 너를 보냈고, 새로운 너와 함께 다시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홍콩에서 이별을 했지만 새로운 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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