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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pr 21. 2023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나는 추상화를 좋아한다. 특히 리히터의 추상화를 좋아한다. 형이하학적으로 말해서 그저 색감이 좋고 조화롭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좋고, 형이상학적으로 말해서 리히터의 작품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흔히 분류되는 현대 추상화들은 대부분 정해진 의미가 없다. 과거 작품들은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1966)'에서 말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와 같이 유사성과 재현을 진리로 삼은채 하나의 이데아에 도달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보이는 것을 그대로 화폭에 담는 예술은 혁신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탈형상화하고 정신적 현현을 나타내는 추상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추상화에 대해선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누군가는 추상화도 예술이며, 감각적인 재현이 아닌 정신의 드러냄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물감만 대충 발라놓고 비싼 돈에 그림을 팔기 때문에 현대미술은 사기라고 한다. 둘 다 일리 있는 말이다. 같은 그림이라도 누군가는 숭고를 느끼고, 누군가에게 그 그림은 작품이 아니라 그저 물감덩어리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존재자와 사물의 관계에 따라서 그 쓰임새가 정해지듯이 내가 누군지에 따라서 그 사물의 가치와 용도는 달라진다. 뒤샹의 '샘'은 예술애호가에겐 작품이지만, 예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변기일 뿐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변기라도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물감덩어리라도 천억 원이 넘는 고가의 미술품이 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작품은 예술미는 정신적인 것의 감각적 표현일 수도 있고, 그저 쓰레기를 작품으로 둔갑시킨 사기일 수도 있다. 


  작품은 자기가 무엇으로 규정되던 신경 쓰지 않는다. 작품은 대자가 아니라 즉자이고,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형이하적 존재이다.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고, 연장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존재자가 아니고 사물이다. 그래서 자신이 쓰레기라 취급을 받던 훌륭한 작품으로 취급되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반대다. 사람들은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고, 만족을 스스로 느끼기도 하고, 여러 감정을 느낀다. 감정의 원천은 본인일 수도 있고, 타자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세계에 의한 것이 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그저 기상현상일 뿐인 무언가에 의해 터전을 잃기도 하고, 그 사건으로 인해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저 형이하학적인 현상에 불과한데 말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다르다. 작품은 자신이 난도질당해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낙서를 당해도 그 자리에서 그 감정 그대로 존재한다. 


  과연 사건에 동요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일까? 즉자적 존재란 그저 연장만 가진 존재라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즉자적 존재인 추상화들이 부럽다. 그냥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에 불과해도 누군가는 별 지랄 같은 해석을 덫붙이며, 그 사물이 마치 위대한 존재자라도 되는 것 마냥 찬양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상에 던져진 피투체인 것처럼, 작품도 그저 세상에 던져진 피투체인데, 왜 인간과 다를까. 인간은 즉자일 뿐만 아니라 대자적 존재인데.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세상에 기투하는 존재인데, 왜 예술작품 따위가 부러울까. 아마 예술작품의 수동성 때문일 것이다. 그 수동성이라 함은 어떠한 평가와 세상의 풍파에도 감정의 동요 없이 존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 들어 자괴감을 많이 느낀다. 세상에 의한 자괴감이기도 하고, 나 자신에 의한 자괴감이기도 한데, 그로 인해 감정의 동요가 크고, 잦다. 그래서 뭐라도 내 정신적 현현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당장 내일은 대학원 면접을 두 군데 가야 하고, 다음 주는 시험 두 개에 과제 하나를 제출해야 하는데,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어서 브런치로 잠시 왔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의심이 들기도 하고, 내가 그 길을 갈 자질이 있나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다른 누군가가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듯이 나도 내가 둘이 되어 나를 보는 것 같다. 긍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객관적이지는 않다. 그저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아침에는 희망을 저녁에는 절망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 뭔가에 집중하기도 어려운데, 할 일은 산더미다. 그래도 해봐야지 뭐.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되고, 괜찮다 싶으면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냥 부딪쳐야겠다. 그러다 죽으면 죽는 거고, 살아남게 되면 그 고통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라는 작품을 받아주지 않는 미술관에 놓을 필요는 없다. 나는 발이 달려서 내게 맞는 곳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아 덤벼라 시발. 왜 이 글의 제목이 추상표현주의인지는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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