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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pr 27. 2023

메타서사와 포스트모던

Meta-narrative and Post-modern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세상은 지배된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일 수도 있고,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에 의한 지배일 수도 있고, 언어나 담론에 의한 지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배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어떤 사람이나 집단, 조직, 사물 등을 자기의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림"라고 나온다. 즉,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복종하게 만들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고, 피지배자는 권력에 복종하여 지배자의 뜻대로 하는 것을 지배라고 하는 것 같다. 과거 군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지배관계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설처럼 왕이 모든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져서 모든 권한은 왕에게 몰수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지배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모든 권한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직접적인 지배와 복종관계에 놓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항상 권력관계에 놓인다. 권력관계에 놓인다고 하면 무작정 부정적인 수직관계를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권력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힘이다. 그래서 나는 권력을 파르마콘 (Pharmakon)에 비유한다. 파르마콘은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수도 있는 것을 말한다. 권력이 독이 되는 경우라면 폭군이나 독재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를 말할 수 있고, 권력이 약이 되는 경우는 권력을 이롭게 사용하여 집단을 잘 통치하는 경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이며 자본주의 사회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수직적인 권력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간접적인 형태로 아직 그 관계가 남아있을 뿐.


언어게임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언어는 규칙이 있는 게임과 같이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의미가 확보된다는 게 언어게임의 의미이다. 만약 내가 "물!"이라고 외친다면 그건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수도공사를 하다가 저 발화를 한다면, 아마 그건 수도밸브를 잠그라는 얘기일 것이고, 음식물을 먹다가 목이 매여서 말한다면 그건 물 한잔을 내게 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마실물이 아니라 뿌릴 물을 말하는 것일 거다. 이처럼 언어는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가 확보된다. 이건 명사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언어게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규칙은 경기자들의 계약 대상이며, 모든 발화는 게임 안에서 하나 의 수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규칙이 없으면 게임도 없으며 미세하게나마 게임의 규칙이 바뀌면 게임의 본질이 바뀐다.


메타서사와 언어게임

  철학자 리오타르는 사회를 언어게임으로 보았다. 각 사회, 학문, 집단 등 한 언어게임의 장에서 게임의 규칙은 다르다. 철학자들에겐 에디슨보다 플라톤이 더 연구할 가치가 있고, 공학자들에겐 플라톤보다 가우스, 맥스웰과 같은 학자를 연구하는 게 더 가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 언어게임마다 추구하는 담론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건 다른 게임이기 때문에 다른 룰이 적용되기 때문에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게임의 룰은 누가 정할까? 


  나도 몰랐는데, 사실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은 다르다. 대충 말하자면 모더니티는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것?이고, 모더니즘은 예술적인 것(뒤샹이나 모네 같은?)이라 할 수 있겠다. 흔히들 모더니즘과 모더니티가 같은 줄 아는데 각각 시사하는 바가 다르다. 모더니티의 핵심은 서사와 언어 게임의 규칙을 설정하는 메타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포스트모던은 모더니티의 핵심인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이라고 리오타르는 말한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이성을 언급하면서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이성이라는 메타서사를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오타르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리오타르는 이성에 대한 강조에 의한 언어게임의 총체화에 반대한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목표는 언어게임의 파편화를 강조하고, 각 개인이 그 언어게임의 술어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 게임의 파편화를 통해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단일한 체계로 지식이 환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리오타르의 주장이다.


리오타르와 푸코?

  내가 푸코덕후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리오타르의 메타서사 이론이 뭔가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 시기에 '말과 사물(1966)'에서 언급한 에피스테메(episteme) 개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메타서사는 서사들을 결정하는 서사를 말하는데,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지식을 형성하게 하는 무의식적인 틀을 의미한다. 과장되게 말해서 진리가 되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메타서사는 언어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에피스테메는 지식이 되는 조건이므로 둘 다 사회에 무의식적 측면에서 영향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이론을 '지식의 고고학(1969)'를 출간한 이후로 딱히 언급하지 않았는데, 결국 푸코의 목적이 근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리오타르가 말한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생각하지 말라하고, 근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한 푸코는 어쩌면 근대의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푸코의 초기, 중기, 말기 사유도 보면 주제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언어게임의 파편화와 그에 대한 보존을 주장하는 리오타르의 주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모더니스트임을 스스로 부정한 푸코가 포스트모던 비평가라 스스로 칭하는 리오타르와 비슷한 의견을 편다는 것은 그가 포스트 모더니스트임을 시사하는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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