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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y 07. 2023

qu'est-ce que l'esthétique?

was darf ich hoffen?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추상화

   누군가는 위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쏟는다고 한다.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의 작품은 미학에서 숭고에 대해 설명할 때 예시로 많이 든다. 숭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수학적 숭고는 그 크기에 압도될 때 느끼는 감정인데, 이 숭고라는 감정은 쾌와 불쾌를 동시에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이 수학적 숭고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자연을 바라보고 느끼거나,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볼 때 느끼는데, 칸트의 미학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우리의 이성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학적 숭고는 높은 곳에서 느끼는 고소공포증 같은 느낌이나,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나도 숭고가 뭔지 잘 모른다. 느껴본 적은 있는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리오타르는 숭고가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하던데, 아 정말 설명하기 어렵다. 난 아직 숭고를 모르나 보다. 


  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진', '선' 그리고 '미'이다. 플라톤은 영혼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진'에 대응하는 영혼을 이성, '선'에 대응하는 영혼을 의지에 그리고 '미'에 대응하는 영혼을 욕구에 맞췄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들의 서열을 정한다. 이성이 의지를 통해서 욕구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이성이 의지를 통해서 욕구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을 '진'의 자리에 놓고, 종교를 '선'의 자리에 놓고, 예술을 '미'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 서열을 정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예술은 학문과 종교에 비해 열등하며, 그의 '국가(republica)'를 읽어보면 예술은 그의 이상국가에서 필요 없다. 따라서 그의 이상국가에는 예술가를 위한 자리는 없다.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세 가지 질문을 한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e?) 그리고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Was darf ich hoffen?). 인식론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통해 대답을 한다. 그리고 윤리학에 대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서, 미학에 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판단력비판'을 통해서 답한다. 뭔가 플라톤이랑 비슷하다. 철학의 분과를 세 개로 나눔으로써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다양한 분야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플라톤과 칸트의 인간학에는 차이점이 있다. 플라톤은 이성, 의지, 욕구로 연결되는 진선미에 서열을 매겼지만, 칸트는 모두 다 중요하며, 서열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미학이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당신이 무엇을 아는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이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맨 위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숭고를 느낄지라도, 누군가는 그냥 물감 덩어리로 쉽게 돈 번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린 너무 다르다. 각자 다른 세그먼트에서 다른 것을 알고, 다른 것을 하는데, 어떻게 똑같은 것을 희망하고, 쾌를 느끼겠는가. 


  하지만 이건 분명한데, 자신만의 미학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 같을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다 같을 수 있다. 하지만 희망하는 것까지 같아야 할까? 그렇다면 너무 소름 돋는 사회일 것 같다. 인식론과 윤리학은 통용되지만, 미학마저 획일화된다면 그건 진정 공산주의가 아닐까. 결국 주체의 자유란 자신의 미학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미학이란 예술적 취향뿐 아니라 모든 선택을 말한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유 없이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때도 우리는 그 사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다 못해 이름이 이쁘다던가, 색감이 좋다던가, 가격이 착하다는 등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이유는 타자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우러러 나온 것이어야 한다. 


  최근에 미학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었다. 진중권 교수가 쓴 책인데, 아주 재미있었다.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한 철학자의 미학에 대해 알기 전에 그의 '진'과 '선'에 대한 철학부터 다져놔야 한다는 것. 다행히 나는 그 책에서 다룬 여덟 명의 철학자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여덟 철학자의 공통된 의견은 일단 예술이란 사회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의 동일자화의 추적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쳐 타자로 존재해야 하며,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예술가가 일종의 절대정신 같은 무언가에 의해 영감을 퍼올리는 영매와 같다고 한다. 여기서 절대정신이란 시대정신이라 볼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정신이 engagement 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예술과 취향이란 그 외의 것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면서, 끝없는 동일자화의 추적에서 도망쳐야만 하는 운명이다. 그래서 유행이 자주 바뀌고, 새로운 예술이 나오는 것일까? 심지어 칸트는 미학을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사이의 심연을 초월하게 해주는 것이라 한다. 현실세계와 우리가 원하는 혹은 이루어야 할 이상세계를 잇는 다리의 역할이 예술이라는 것이 칸트의 미학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현실세계와 이상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시대적 풍조의 현현인 것인가? 


  나도 미학이 뭔지 모른다. 어쩌면 절대적 미학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사회의 타자로서 끊임없이 동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도망치는 운명인데, 어떻게 종착지가 있을까. 누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스타일이 바뀌고, 음악취향도 바뀌고, 입맛도 바뀐다. 우리가 쾌를 느끼는 요소가 달라진다는 건 사회가 변했다는 것인가 그럼? 아니면 사유가 변한 건가? 


  헤겔은 타자가 변장한 동일자라고 한다. 왜냐면 결국 변증법에 의해서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헤겔은 언젠가 절대정신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절대정신도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계속 세상은 바뀌고, 나 또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절대적 정신에 도달하기 전에 인간은 죽음에 도달한다. 아 결국 미학의 궁극적 혹은 절대적 종점이란 결국 존재의 죽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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