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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y 14. 2023

의지에 의한 속박과 예속

servitude et servitude par la volonté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 - 내란의 예감(1936)

  요즘 사람들은 감각을 안 쓴다. 귀는 에어팟이나 갤럭시 버즈로 틀어막고, 시선은 스마트폰 액정에 갇힌 채 산다. 그리고 지식은 유튜브나 나무위키 같은 곳에서 얻는다. 기사는 제목만 보고 내용은 안 본다. 음악은 AI가 큐레이션 해준 것을 듣거나, 다른 사람이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자 헤드폰을 벗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길가의 가로수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직접 하나하나 다 선별해서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세상엔 너무나도 많은 재밌는 영상과 내가 굳이 만들지 않아도 이미 까리한 플레이리스트가 있는데, 이것들에 다가가는 게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아니면 인간의 인문학적 위기인가. 작금의 이 양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각의 예속

  눈은 디스플레이에, 귀는 이어폰이나 헤드셋에 틀어박혀있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신호등을 기다릴 때에도, 심지어는 걷는 와중에도. 그래서 앞에 뭐가 달려오는지, 누가 걸어오는지, 아니면 내가 가는 길이 인도가 맞는지 찻길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누군가 나를 불러도,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직원이 주문번호를 불러줘도, 내려야 할 승강장이라서 음성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모른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감각을 잃고 있다. 사람들의 건강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역설적이게 시각과 청각을 포기하고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길래 걸으면서도 화면에 눈을 처박고, 얼마나 감동적인 음악이길래 본인을 불러도 귀에서 이어폰을 처박고 있을까? 심지어 요새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느라 사고가 많이 나서 보도블록 바닥에도 신호등을 설치한다. 

  얼마나 웃긴 일인가. 반도체를 만들고, 우주에 사람을 보내고, 형이상학적 사색을 하는 존재가 고작 6인치 화면에 눈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리고 얼마나 빈번하게 사고가 났으면 바닥에 신호등이 있는 곳이 흔해졌을까. 귀를 틀어막고 있으니 자동차들이 달리는지 신호에 걸려서 멈춰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니 어떻게 보면 저 방법이 제일 최선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부끄러운 인간의 기술에 대한 예속 때문에 예산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 곳에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도 이건 장치는 늘어만 갈 것이고, 더욱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갈수록 더 화면에 예속되어 목을 굽히고 다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속

  인간은 감각만 빼앗긴 것이 아니다. 인간은 취향도 빼앗기고 있다. 알고리즘으로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받고, 시스템이 자꾸 노출시키는 것에 눈이 간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1944)'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시장은 자본에 이끌려 가는 것일까? 


  음악은 과거에 비해서 듣기도 쉬운데, 선곡은 더 쉬워졌다. 과거에는 LP나 CD를 교환하면서 곡을 바꿨는데, 현재는 그저 클릭하나로 곡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물리적인 저장공간을 이용하지 않고 재생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용은 더욱 용이하다. 따라서 음악의 가치는 과거와 달리 폭락했고, 너무나도 익숙해서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음악이 쉽게 널리 보급된 것은 문제가 아니다. 좋은 음악을 쉽게 누구나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따라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과거에는 음악을 직접 다 들어보고, 자꾸 생각나거나 마음에 들면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따라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는 건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편집샵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플레이리스트도 직접 만들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되었다. 공부할 때 듣는 1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 운동할 때 힘나는 플레이리스트, 독단의 잠에 빠진 칸트처럼 공부하는 플레이리스트, 새벽감성 플레이리스트, 카페 음악 플레이리스트 등 너무나도 많은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그래서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곡들을 직접 들어보고 큐레이션 할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이 미리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을 수가 있다. 심지어 좋아요나 조회수가 드러난다면, 그 플레이리스트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플레이리스트와 자동 재생이다. 플레이리스트의 공유를 통해서 본인만의 음악적 취향을 잃게 되고, 자동 재생을 통해서 더 이상 음악을 직접 선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틀기만 하면 좋은 음악이 나오고, 다른 사람들의 댓글이나 좋아요가 이를 보증해 주는데, 왜 시간을 들여서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겠는가. 타인이 정해놓은 취향을 혹은 AI가 골라주는 취향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함으로써 우리는 미학적으로 예속되는 것이 아닐까.


자발적 노예화

  따라서 인간은 노예와 같다. 기존의 노예와 다른 차이라면 인간은 자신의 주인을 직접 창조했고, 주인의 명령이 없어도 주인에게 충성한다. 모든 감각은 주인에게 맡기고, 주인이 추천하는 취향을 적극 수용한다. 이렇게 착한 노예가 어디에 있을까. 시키지 않아도 일을 하고, 교육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자꾸 뭘 배우려 하고, 배터리가 부족하면 어떻게 해서든 충전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주인님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떨어뜨리면 자신이 마치 그렇게 유린당한 것처럼 충실히 복수한다. 


  결국 우리는 감각도 빼앗기고, 취향도 빼앗겼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이 조그마한 주인 없이 못 산다. 주인의 입장에서 이런 노예는 얼마나 좋을까? 본인의 배터리가 부족하면 알아서 충전해 주고, 파손되면 마치 본인이 다친 것처럼 아파하고, 하루 종일 돌아봐주는 노예가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인간은 이런 주인이 얼마나 좋을까? 재밌는 것을 보면 더 재밌는 것을 보여주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접하게 해 주고, 내가 못해도 내게 쓴소리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보여주고, 접하게 해주는 주인이. 아 그렇다면 공리주의적으로 주인과 노예 모두 행복하니까 이는 당연히 옳은 운명인가?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내주는 조건으로 피상적인 즐거움만 얻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관심도 가지지 않으며, 그저 이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고, 유행에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영상을 보고 마음에 들면 좋아요, 아니면 싫어요를 누르면 인공지능이 내가 좋아할 만 것을 추천해 주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좋아요와 싫어요라는 선택지 만으로 취향이 정해지고, 존재가 규정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고, 우리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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